도청과 포탄, 무엇이 중헌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한국 국가안보회의(NSC) 도청사태는 두 개의 층위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하나는 도청행위 그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도청된 내용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미국에 의해 우리의 주권이 침해됐다는 의미이다. 안보실이 미국 정보 당국에 의해 뚫렸다 해도 당장의 실제적 안보 위협은 없다. 미국은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자기 군대를 주둔시키고, 때때로 전략자산까지 전개시키고, 더구나 도청하는 데 있어 악의가 없었다지 않은가. 그러므로 도청 자체는 감정문제다. 아무리 큰형님 같은 친구라지만 내 집 안방을 엿들었다니 기분이 몹시 나쁘고, 그런 일을 당하고도 항의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윤석열 정권의 행태에 열불이 나는 것이다.
정작 심각한 것은 도청된 문건에 담긴 내용이다. 우리 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용될 155mm 포탄을 제공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감정적인 문제로 끝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외교 안보가 심하게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후 몇몇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10만 발이 됐든 33만 발이 됐든 50만 발이 됐든, 대여가 됐든 우회 수출이 됐든, 이미 우크라이나에 전달됐거나 앞으로 전달될 모양이다. 이런 사실이 확정되면 한국과 러시아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사이가 된다. 러시아가 서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지는 않겠지만 수많은 러시아 교민들의 안전과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할 판이다. 러시아와 북한 간 협력의 강화로 인한 간접적 안보 위협도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우크라 포탄 제공, 아직은 침묵하는 러시아」 시민언론 민들레)
‘포탄 수출’을 중하게 보면 비로소 이해되는 윤 정부 행태
사태를 이런 시각으로 보니 사태 발발 후 우왕좌왕, 횡설수설했던 윤 정부의 대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처음에는 도청 사실이 아예 없었다거나 도청 문건이 위조된 것이라고 사실 자체를 부정하다가 “동맹국인 미국이 우리에게 어떤 악의를 갖고 했다는 정황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오히려 미국을 감싸다가 "정치권에서 이렇게 정쟁으로 (만들고), 언론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다루는 나라는 없는 것 같다"고 투정을 하다가 “국익과 국익이 부딪칠 때 자국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언론의 옳은 길”이라고 언론 탓을 하며 사태를 얼버무리려고 한다.
나는 도청 당한 사실에 대해 화를 내고 도청한 상대에게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 비록 쇼라 할지라도 너무나 당연한데, 여기에 무슨 ‘국익’이 결부될 수 있나 몹시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이때의 ‘부딪치는 국익’이란 도청을 인정하고 말고에 걸린 한국과 미국의 국익이 아니라 포탄을 주고 받는 문제에 있어서의 국익을 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한국이 러시아군을 표적으로 하는 포탄을 대량 수출했다는 것이 사실로 확정된다면 우리에 대한 러시아발 국익 침해가 심대하게 우려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워싱턴 덜레스공항에서 특파원들이 도청 문제에 대해 계속 질문하자 “같은 주제로 계속 물어보시려면 저는 떠나겠습니다. 됐습니까?”라고 신경질을 부린 김태효 차장의 태도도 우국충정의 발로라고 이해해 줄 만하지 않은가. 계속 도청 건을 문제 삼아 확대시키면 러시아에 대해 우크라이나 포탄 지원 사실을 부인하거나 덮거나 속이려는 시도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러시아를 속일 수 있을까? 러시아만 해도 미국만은 못하겠지만 만만치 않은 정보력을 가진 강대국이다. 각국의 무기 생산 및 보유 상황, 무기의 이동 경로를 다 파악하고 있다고 봄이 마땅하다. 더구나 어떤 경로로든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지원하기로 했고 그 방법에 대해 한국 고위 안보 관계자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생생한 정황이 도청으로 드러난 마당이다. 러시아가 바보가 아닌 이상 속아 넘어갈 리가 없다.
불법으로 저지른 포탄 수출에 대한 국내 정치적 우려
그러므로 윤 정권이 사실을 부정하려 하고 회피 내지는 축소하려고 우왕좌왕 하는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에 대한 우려나 국빈 방문을 앞둔 미국에 대한 공손함이 아니라 무기판매의 불법성이 드러나면 큰일이 날 만한 국내 정치상황 때문이다. 우선 도청 문건에도 나타나듯 포탄의 ‘최종 수요자’ 문제가 있다.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기존 방침을 변경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전략물자는 평화적 목적에 사용되는 경우에 한해 허가한다”는 법조항을 위반하는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런 막대한 살상무기를 교전 중인 한 일방 국가의 극렬한 반발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른 일방 국가에 지원하면서 국회의 사전동의는커녕 통고조차 하지 않은 채 비밀리에 진행시켜도 되는 일인가. 명백히 탄핵사유다.
일각에서는 김성한 안보실장과 이문희 비서관이 블랙핑크 때문이 아니라 포탄 수출을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버텼기 때문에 경질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불법 무기 수출 혹은 대여를 걱정했다는 이유로 국가 안보 최고위 공무원들이 쫓겨났다는 얘기다. 명백히 청문회 감이다.
나는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해 언론이 전혀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전혀 기이하지 않다. 우리 언론은, 대통령실이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오래 전부터 국익을 등한시하면서 자기들의 사익을 챙기고 편견을 강화하는 것에만 몰두해 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이미 서방 언론에 편승해 젤렌스키를 영웅화하고 푸틴을 악마화 하는 등 확실히 우크라이나 편에 서 왔다. 그런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지원하는 문제가 부를 국익 손상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제 할 일 모르고 제 밥 못 찾아 먹은 지 오래인 야당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할 의지가 없는 듯하다. 기이한 것은 오히려 윤 정권이 이를 심각한 상황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