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로 뒤집힐라"…완승 쾌재 속 4년 뒤 걱정하는 일본
일본 쪽 전문가들 '위안부 합의' 파기전례 상기
'제3자 변제' 최종 해결책 가능성에 부정적
"윤 보수고정표 다지기 전략 그만둘 이유 없지만
기시다 상응대처 못하면 '밥상 뒤엎기' 못 막아"
“만가쿠 가이토(滿額回答 만액회답)이긴 한데…” “4년 뒤의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나면 뒤집힐 공산이 크다.”
‘만가쿠 가이토’는 일본에서 임금교섭 때 노조 쪽의 임금인상 요구를 그대로 다 받아들여 지불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뒤의 말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말은 지난 16일의 도쿄 한일 정상회담에서 한국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와 관련한 일본정부의 요구를 그대로 몽땅 다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쓰였다. 적어도 일본 쪽에선 이번 한일 정상회담 결과를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한국정치에 밝은 기무라 간 고베대학 교수(정치학)다.
한국정부 해결책, 일본에겐 ‘만가쿠 가이토’
그는 3월 23일 <아사히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정부는 종래 징용공(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는 한국의 국내문제이므로, 한국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 주장이 유지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생각하면, 윤석열 정권이 내 놓은 해결책(‘제3자 변제’)은 만가쿠 가이토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이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는 일본과는 상관없는 한국 국내문제라는 걸 한국정부가 결과적으로 공식 인정했다는 얘기가 된다.
한일 정상회담 뒤 윤 대통령 지지율은 내려갔으나 기시다 후미오 총리 지지율은 크게 올라갔다.
그런데 기무라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이런 말도 했다.
“윤 정권에 의한 해결책의 제시와 이번 한일 정상회담으로 징용공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을 얻었느냐고 하면, 대답은 ‘노(no)’다.”
일본에 대한 햇볕정책
기무라 교수의 이런 말이 한국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또 한사람의 한일관계 분야 전문가라 할 <아사히신문> 국제(한반도)사설 담당 하코다 데쓰야 논설위원이 그 사흘 전인 20일에 쓴 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일본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윤석열 정권은 출범 이래 북조선(북한)에게는 차가운 입김을 내뿜고 있지만, 일본에게는 따뜻한 빛을 계속 비춰 왔다. 마치 일본에 대한 태양(햇볕)정책 같다.”
“역사문제를 둘러싼 일본쪽의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모처럼의 정치결착(해결)이 무산될지도 모른다.”
하코다 논설위원이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에게 예상 이상의 선물을 안겨 준 이번 한일 정상회담의 ‘공’은 국내의 반대를 무릅쓴 윤석열 정부의 과감한 대일 햇볕정책에 있는데, 기시다 후미오 일본정부가 자국내 우파세력의 비판을 우려해 아베 정권의 강경한 ‘역사노선’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한국정부의 ‘결단’에 걸맞은 호응을 보여 주지 못함으로써 다시 판이 깨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4년 뒤 밥상 뒤엎기?
두 사람의 말에서 공통되는 것은, 우선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와 관련해 한국정부가 제시한 ‘해결책’을 일본 쪽은 예상을 뛰어넘는 획기적인 제안 내지 성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제안 내지 성과가 아직 완결된 것은 아니며, 자칫하면 깨어져 다시 원상복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또는 두려움이다.
이를 ‘밥상 뒤엎기’라고 표현한 기무라 교수는 그 원인을 한국 내부상황에서 찾았고, 하코다 위원은 일본정부 쪽의 미흡한 대응에서 찾았다. 기무라 교수는 한국 내부상황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일본과는 다른 한국 내부사정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일본에게 다시 없을지도 모를 대단한 기회 내지 선물을 안긴 윤석열 정부의 ‘해결책’이 무산되지 않도록 일본 쪽이 현명하게 대처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무라 교수는 “애초에 일본정부와 한국정부가 해결 형태에 대해 명확한 합의를 한 것은 아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식적으로 뭔가를 약속한 상태는 아니다. 또한 한국에서는 여야당 대립이 격화돼 야당은 이번 해결책에 반대하고 있다. 만일 4년 뒤의 한국 대통령선거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나면 뒤집힐 공산이 크다.”
“한국정부는 2015년에 일본과 ‘위안부 합의’를 했으나, 국내의 비판이 거세지고 2017년에 정권교체가 일어나자 합의를 형해화해 버렸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성공할 수도 있다…윤정부의 전략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정부의 해결책에 대한 한국 내의 찬성여론도 예상외로 높다는 데에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한국정부의 해결책이 성공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했다.
기자가 “일본에서는 ‘밥상 뒤엎기’라고도 하는 문제다. 이번 회담이 플러스 성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을까”라고 묻자 그는 “있다”고 대답했다.
“윤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4년 남았다. 양국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는 이번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일관계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공유될 가능성도 있다. 성패의 열쇠는 한일이 서로 자신과 상대의 실상을 인식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해결책이 발표된 직후에 한국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를 보면, 분명 반대가 59%로 다수를 차지했다. 다만 찬성이 35%였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쪽에서 징용공(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상황 속에서 실시된 조사였던 점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높은 수치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그는 이렇게 찬성이 많았던 이유로, 한국에서 역사문제에 대한 관심이 낮아지고 있는 경향이 표출된 것이라며, 그 배경에 일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낮아지고 있는 현실도 지적했다. 한국의 무역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예전에 비해 낮아지고 있는 점도 들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여론조사 결과를 분석했는데 설득력이 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층의 대다수가 해결책을 지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보수파와 진보파의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고 있기 때문에, 보수파인 윤 대통령이 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이든 보수파는 대체로 이를 지지하는 상황이다. 자신의 지지층이 바라는 것이라면 윤 대통령으로서는 그런 정책을 그만둘 이유가 없다.”
“대통령 자신도 요즘 중간층의 지지를 얻으려 하기보다 진보파를 공격해서 자신의 지지층을 더욱 굳히는 쪽을 노리고 있다. 일본에서 아베 정권 때 일어난 현상과 닮았다. 그런 상황이니까 정권교체가 일어나면 (윤석열 정부가 제시한) 해결책이 뒤집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기무라 교수는 그 배경에 한일 간의 힘의 관계 변화도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한일관계를 돌아보면, 예전에는 일본 쪽이 ‘강하게 나가면 한국은 뒤로 물러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상대를 바꿀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안부 합의 뒤의 경험이 일본에 각인시킨 것은 한국의 ‘밥상 뒤엎기’를 막을 힘이 자신들에게 없다는 현실이었다.”
기무라 교수가 보기에 이번에 상대를 바꿀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행동한 것은 오히려 윤 대통령인 것처럼 보였고, 그는 일종의 휴전선언을 한 상태에서 일본에게 함께 가자고 부른 형국이 됐다고 했다. 거기에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대만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제적인 안전보장체제 구축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는 가운데 “우리는 이렇게 큰 양보까지 해가면서 한미일 협력관계 강화에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해서 존재감을 높이고, 외교상의 득점을 노리는 윤석열 정부의 계산도 작용하고 있다고 그는 봤다.
이제까지 ‘투항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국정부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온 윤석열 정부의 자세로 보건대, 기무라 교수가 지적하는 윤 정부의 점수따기 어필 대상은 미국일 것이다.
한국 정권교체·정책변화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
여기에서 기무라 교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얘기를 하는데, 정권교체에 대한 한일 두 나라 간의 인식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먼저 한국 쪽에 바라는 얘기부터 했다. “정권교체 때마다 국가 간의 약속을 깨서는 곤란하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는 한국 쪽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외교에서는 함정을 만드는 작업도 중요하니까.”
그리고 일본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 쪽에서는 정권교체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게 어떨까. 한국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정책이 바뀌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에서는 정권이 특이할 정도로 안정돼 있기 때문인지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민주주의의 한 형태다.” “서로 다른 부분을 지닌 나라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바탕 위에 서로 지켜야 할 최저한의 룰이 무엇인지를 함께 찾아간다는, 그런 관계성 만들기를 시작해야 한다.”
기무라 교수의 이 말은, 예컨대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12월 28일 한일 간에 체결한 ‘위안부 합의’(12.28 합의)를, 박 대통령 탄핵 뒤인 2017년에 집권한 문재인 정부가 사실상 파기한 것과 군사정부 시절에는 불가능했던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이 한국 민주화 이후 가능해진 현실을, 2차 대전 이후 사실상 자민당 일당 지배체제가 계속되고 있는 일본에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정권교체가 없는 일본에서는 정책도 큰 변화가 없는 만큼, 잦은 정권교체와 정책변화가 일어나는 한국 상황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민당 정부가 걸핏하면 꺼내는 한국정부의 국제법 위반 주장도 일본과는 다른 한국사회의 현실을 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데에 그 원인의 일부가 있는 게 아니냐는 얘기로도 들린다.
아베 역사노선 못 벗어나는 기시다
하코다 논설위원은 주변의 신중파 의견을 물리친 윤 대통령의 ‘결단’의 배경에는 격동하는 국제정세를 고려한 전략에다 “북한이나 국내 좌파세력에 대한 관점적인 아집”도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서 일본 기시다 정부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한다.
“기시다 정권은 우파의 비판을 우려해 아베 정권의 ‘역사노선’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는 아베씨와 상담할 수도 없는 현실이 몸을 움츠리게 했다. 그런 균형을 잃은 해결책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예측할 수 없다. 북조선에 대한 햇볕정책의 3개 기본원리 가운데 가장 중시되는 첫 번째는 ‘상대의 위협이나 도발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문제를 둘러싼 일본 쪽의 대응에 따라서는 모처럼의 정치결착(해결)이 무산될지도 모른다.”
윤석열 정부의 대일 햇볕정책이 거기에 상응한 대처를 하지 못하는 기시다 정부의 수구적 대응을 ‘위협’이나 ‘도발’로 받아들이는 순간 대일 햇볕정책은 끝장날 것이라는 경고처럼 들린다.
강경 우파세력 활용해 온 집권 자민당
기시다 정부가 자민당 내 우파, 우익의 비판 때문에 움츠리고 조심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실제로 자민당 내 우익 또는 강경보수 세력의 견제 때문에 중도나 온건보수 집권세력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들의 눈밖에 나면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는 목청 큰 그런 우익 또는 강경보수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집권세력 스스로의 우편향 강경노선이나 정책을 원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당내 역학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호도하고 은폐하는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 됐든 일본정부는 지만당 내 우파세력의 존재를 잘 활용해 왔다.
아베 정권 시절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에 대해 근거없는 구실을 대며 수출규제에 나서자 한국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기로 맞서면서 대립이 격화됐다. 미국의 압박으로 한국정부가 GSOMIA 파기를 철회하고 조건부 연장으로 수정한 뒤 한일 간에 얼굴을 맞대고 수출규제에 관한 협상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그때 아베 정부는 한국과의 협상을 위해 합의한 내용을 동시에 공표하기로 약속해 놓고 한국이 공표한 뒤 7~8분 뒤에야 공표함으로써 마치 한국정부가 먼저 양보했기 때문에 일본정부가 이를 받아 합의해 준 모양새를 만들어 한국정부가 크게 반발했다.
합의내용도 그렇거니와 수출규제를 주도한 경제산업성 관리가 협상과정에서 한국 쪽에 잘못했다며 사과해 놓고는 공식 발표 때 그런 사실을 감추고 오히려 한국정부가 양보해 일본외교가 완벽하게 승리한 양 포장해서 발표하는 이른바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때 분개한 정의용 당시 국가안보실장이 일본을 향해 자꾸 그런 식으로 거짓말하면 이쪽도 가만있지 않겠다며 ‘좋아, 덤벼 봐. 상대해 줄게’라는 뜻의 “Try me”라는 말까지 공개적으로 쓰는 바람에 화제가 됐다.
일본정부의 그런 언론 플레이에 대해 집권당 내 강경 우파세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집권세력이 한국에 밀리지 않았다는 정치적 포장을 위해 그런 무리수를 썼다는 관측이 있었다. 그 한편으로, 당내 우익 강경파들의 압박은 구실에 지나지 않으며 실은 집권세력 자체의 강경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오히려 우익 강경파의 존재를 협상 상대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었다.
독도·후쿠시마 수산물과 오염수 발언 오리무중
이번 도쿄 정상회담 뒤에도 예컨대 ‘독도문제’나 후쿠시마 사고원전 오염수 문제, 그 지역 일대 수산물 수입 재개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상들 간에 오간 얘기들이 일본 언론을 통해 간접적으로 일부 공개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당사자들이 입을 열지 않는 한 그렇게 공개된 일부 발언들의 진위를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권력자들의 ‘언론 플레이’라는 것이 본래 그런 확인불능 상태를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긴 하나, 진실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 발언(또는 대화)을 실제로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설사 발언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언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날리면’ 소동에서도 봤듯이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반드시 진실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