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과 실리 모두 잃을 윤석열의 강제동원 해법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 방식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겠다고 해법을 제시했다. 2018년의 한국 대법원 판결, 즉 일본기업에 대한 강제집행절차(현금화)를 뒤집는 것이다.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식민지배 책임 인정이라는 오랜 명분은 물론이고, 한국 대법원 결정도 무시하면서 현실적 대안, 즉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과 문제에 대해서는 단지 과거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는 말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언급하였다. 이번 한국 정부의 조치는 한국의 일방적 선언이므로 일본은 어떠한 추가 조치나 배상의 부담도 완전히 면제받았다.
피해자의 셀프 과거청산
그런데 과연 이런 방법으로 한국은 미일 관계에서 안보와 경제라는 실리를 찾을 수 있을까?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과 같은 국제사회에서 힘과 명분을 포기한 채, 알아서 굽히는 피해자에게 선물을 줄 가해자가 있을까? 그리고 과연 ‘제 3자 변제’ 의 제 3자가 누구인가? 박정희의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청구권 자금 중 무상 3억 불로 설립된 포스코라는 한국기업이 출연금을 내는 재단이 과연 ‘제 3자’로 볼 수 있는가? 이것이야말로 모든 국민과 피해자를 속이는 말장난이 아닌가?
결국 윤석열 대통령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방식, 국가의 법치와 국민의 자존심을 뭉개고 사실까지 호도하면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 말뚝을 박았다. 일본에게는 한국이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은 채 다시 사귀자고 알아서 숙이고 들어오는 즐거운 형국이며, 미국에게는 계속 싸우던 아시아의 두 자식 중에서 동생이 이제 형에게 더 이상 빚 청산 요구하지 않고 형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굴복하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한국 정부의 셀프 과거청산 선언이 발표되기 무섭게, 윤석열 대통령의 다음 주 일본 방문 발표가 이어졌고, 미국 국빈 방문 계획도 발표되었다.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 해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재개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번 선언으로 한국이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무엇을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의 방미에 대해 백악관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한 초청이라고 했다. 한국 언론은 이 방문이 프랑스 대통령에 이은 바이든 정부 들어 두 번째 국빈 방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며,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수조 원을 투자한 게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도 논평한다. 마치 과거 조선 왕들이 안보 보장과 국왕 책봉 조건으로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감읍하던 모양새를 연상케 한다. 즉 지난 3.1절 기념사와 이번 선언에서 계속 나왔듯이 윤석열 정부는 이제 한미일이 오직 미래의 발전을 위해 글로벌 가치동맹으로 한 몸이 되었다고 자랑한다.
한일관계 정상화는 미국의 대중 압박 숙원사업
그런데 일본과 미국의 어떤 논평에도 한국의 이번 결정으로 한미일이 이제 진정한 파트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 반대로 미국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 규제를 통해 대중국 경제압박 기조를 강화하여 중국의 부상을 완전히 차단하겠다는 기조를 견지한다. 미국은 대중 반도체 기술 및 무역 제재 조치의 일환으로 중국에 진출해 있는 삼성 SK와 같은 업체들의 장비 수출 및 장비 유지·보수 서비스 공급을 막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보조금을 빌미로 한국 기업의 반도체 핵심기술을 미국에 넘겨주는 것은 물론 공장 운영에 따른 초과 이익분까지 미국 정부에 반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올해 들어 중국과의 무역적자는 더욱 확대되었고, 1월 대중 반도체 수출은 그 이전 달보다 44.5% 감소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한국의 이러한 미국 줄서기에 대해 더욱 강한 경제적 보복을 가할 것이다. 중국은 한국 반도체 수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런 중국과 척을 지고서 어떻게 한국 경제의 활로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선언은 박정희가 잘못 낀 첫 단추에 이명박과 박근혜가 다른 단추 몇 개를 또다시 끼고, 윤석열이 남은 마지막 구멍에 남은 단추를 낀 것이라 볼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 잘못 낀 단추를 뺄 수는 없으니 그냥 엉거주춤하면서 추가 단추를 끼지 않은 정도로 지내왔다고 볼 수 있다.
잘못 낀 단추란 무엇인가?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 책임을 묻지 않은 채 경제협력 자금을 받은 것이다. 사실 그 단추는 미국이 지시해서 한국 정부가 일본과 물밑에서 협상해서 낀 것이다. 1952년 채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조선 침략 책임을 묻는 대신에 일본은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에 복귀했으나 한국은 일본의 전후 책임 대상국에서 빠졌다. 즉 한국은 일본의 완전 식민지였고, 일본과 교전 대상국이 아니었으므로 일본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물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후의 한일 관계는 모두 한일 당사자가 해결할 문제였고, 미국은 일본의 든든한 보증자였다. 이승만은 이 내용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대일 강경 언사를 남발하였고, 한일 과거사 청산을 방기했다.
잘못 낀 첫 단추, 박정희가 받은 경제협력 자금
이 교착을 뚫어준 계기가 4.19 혁명과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였다. 당시 다급한 것은 미국과 일본이 아니라 가난한 한국,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서 정당성의 결핍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있던 박정희 군사정권이었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기조와 미국의 강력한 압박 하에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책임을 인정받지 않은 채, 일본이 준 경제협력 지금을 받았다. 그 상당 부분은 현금이 아니라 후발국 한국을 일본 경제에 의존하게 만든 각종 장비와 기술 인프라 등이었다. 이 경제협력 자금에는 강제동원 노동자의 밀린 임금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그 후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제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국제사회의 기조 변화로 2차 대전 당시 많은 독일 기업들이 강제노동으로 부를 축적한 사실과 그 책임을 인정하고 물질적 보상도 했다. 이런 분위기 하에서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도 일본의 태평양전쟁 당시 노무동원이나 강제노역으로 많은 자본을 축적했던 주요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였다. 그 결과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대법원의 2018년 11월 29일의 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확정판결이었다. 일본은 그 판결이 국제법 위반이어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하였고, 대한 반도체 수출 규제를 했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기업이 공동으로 재원을 만들어 확정판결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해당액을 지급하자는 문재인 정부의 제안도 거부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가 구식민지 국가나 침략을 당했던 국가에게 사과를 하거나 보상을 한 예가 없다고 사과를 거부해 왔지만, 이번에는 아예 석동현, 김영환 등 윤석열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이 일본을 대신해서 윤석열 대통령을 엄호한다. 그러나 독일도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게 식민지 지배와 학살에 대해 사과를 했고, 벨기에도 콩고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를 했다. 이탈리아는 식민지였던 리비아에 대해 배상을 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일본의 미쓰비시는 강제노역 동원된 중국인에 대해서는 사과를 하고 보상까지 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는 조선 식민지 지배는 한국인들이 합의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이승만 정부 이후 역대 보수정부가 이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후속조치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역대 보수정부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위안부나 강제동원의 폭력성과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제대로 알리거나 설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한 원인이다. 특히 일본은 역대 정부가 이명박의 독도 방문처럼 전혀 진정성 없이 국내정치용으로 반일감정을 이용했다고 본다. 즉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꿈쩍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는 미국이라는 뒷배가 있기도 했지만, 한국 역대 보수정부의 행태와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게 계속 구걸하기만 하는 한국의 보수정부를 일본이 무서워할 이유가 없고, 미국이 한국 편을 들면서 일본의 양보를 압박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명분을 버리면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을까?
장차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활성화되고 일본의 대한 반도체 소재 부품 규제가 풀리면 한국은 약간의 경제적 도움은 얻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한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차별 대우는 철폐되지 않을 것이고, 한국 반도체의 중국 수출에 대한 제재는 더 커질 것이다. 나아가 미국은 지금까지처럼 한국 기업이 갖고 있는 반도체 기술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 한국은 여기서 무슨 경제적 실리를 찾을 수 있을까? 미국, 일본과의 안보동맹이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인가? 남북한의 충돌 시 미국과 일본이 한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
강대국에 대해서는 국민의 자존심과 자주성을 지켜주고 국민과 그 일부인 피해자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논리로 달래주는 것이 국가 존립의 기본이자 마지노선이다. 이것을 팽개친 뒤 5년 단임의 국가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얻을 수 있는 실리, 국제사회에서 내놓을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일까? 중국의 보복이 닥쳐오고 서민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윤석열대통령의 자발적 대미, 대일 항복선언은 이 정부 최대의 외교 참사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