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치즈에 빌붙은 벌레들'을 떼어내는 법

2023-02-16     김민웅 칼럼
​김민웅 전 경희대 교수/ 촛불행동 상임대표​

부패가 일상인 사회의 잔혹함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의 임무를 ‘자본의 치즈에 빌붙은 벌레들’에 대한 질타라고 본다. “권력과 돈 외에는 아무것도 진실일 수 없는 사회는 이미 무의미한 사회, 활력의 가면 아래 시드는 허무한 사회”라고 그는 덧붙인다. 그런데 이런 사회를 바로잡을 공공 지식인은 점점 멸종상태에 이르고 있다. 자본의 지배가 갈수록 절대화되는 세상의 참담한 현실이다. 자본의 자유를 모든 자유의 기준으로 삼는 신자유주의는 법, 교육, 언론, 정치를 모두 이렇게 자신의 수단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당연히 버려진다.

그런 사회가 잔혹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부패는 일상이다. 대장동 50억 클럽 무죄판결은 그런 일상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된다. 특권동맹세력 내부에서는 당연한 결론이었을 뿐이다. 일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특히 '자본의 치즈에 달라붙은' 기성 언론들과 권력기관의 합작, 아니 노골적인 협잡이 주효했다. 검찰과 언론, 사법부는 자본의 치즈 창고를 지키는 수문장이자 그 치즈에 빌붙은 벌레라는 질타를 받아도 별로 할 말이 없게 된 형국이다.

문제는 이들이 치즈에게는 벌레 정도인데, 국민들에게는 못이 박힌 방망이를 함부로 휘두르는 조폭이라는 점에 있다. 회사 미납금 800원으로 피곤을 덜기 위해 커피를 사 마신 기사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부르주아의 성채에서,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치도곤을 당하는 장발장은 도처에 있다.

제로(零)를 애무할 수 있는가?

대통령의 배우자가 주가조작을 해도 그건 결혼 전의 사적(私的) 삶이라고 호도하는 소리가 일부 진보정치를 한다는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지경이다. 김건희 특검 반대 논리다. 공직에 들어설 때 검증 대상에는 사적 시간과 공간 역시도 포함되게 마련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공권력이 사유화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진다. 그건 우리의 현실에서 사실이 되었다. 진보정치를 한다는 자들 가운데는 정적 제거 정치공작의 대상이 된 제1 야당 대표에 대한 부당수사에 대해 질타하기보다는 불체포 특권을 누리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특권이 문제인지, 정적제거 공작이 문제인지 도무지 구분조차 하지 못하는 정치적 색맹들이다. 이런 식이면 한통속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이들조차 '치즈에 빌붙은 벌레들'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문학평론가이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세운 도정일은“비판력이 마비될 때 망각은 죽음의 책략”이라고 똑 부러지게 짚고 있으며, 도덕의 나침반이 없는 사회의 비극을 경고한다. 이 나라 언론은 새로운 사실로 지난 시간의 죄를 끝없이 덮어 파묻는다. 망각의 조작기술자들이다. 도덕의 나침반은 황폐해진 묘지(墓地)의 뒷산에 숨겨 놓았다. 사회 전부가 구도적 자세로 살지는 못해도 구도자조차 자본의 치즈에 기생하려는 욕망이 더 크면 그야말로 망조(亡兆)다. 도정일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청정 수행자에게 구도의 길은 신통술 터득의 길이 아니다. 이를테면 가사 장삼 주머니에 뭉칫돈이 날아들게 하는 것은 신통술일 수 있지만 스님의 먹물 옷 주머니는 그 안에 뭉칫돈 넣고 다니라고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스님이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은 오래된 무덤 속처럼 텅텅 빈 주머니 안의 공허를 맨손으로 만지기 위해서다. 제로(零)를 애무하는 것은 불교적 구도의 핵심이다.”

공허, 비어 있음, 제로(영/零)를 구도자의 처지에서 윤리적 기피어인 ‘애무’까지 할 거야 없지 않은가 하겠으나 그러지 않고서야 도덕적 본령을 지켜낼 수 있을까 싶다. 자본의 치즈에 붙어서 빌어먹거나 아예 자본의 치즈 공장이 되고 있는 종교의 타락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판국에는 구도자의 가사 장삼은 위장술에 불과해진다.

불법이 된 무기의 소지

욕망의 고삐를 풀어버린 채 자본과 권력이 일체화된 육신의 일부가 되려는 자들은 뻔뻔하고 기만적이고 폭력적이다. 윤석열 정치검찰은 그 대표적인 자들이다. 이들과 마주해서 매일 살아가야 하는 국민들은 도정일의 다음과 같은 경귀에 나오는 아이들과 다를 바 없게 되고 있다.

“도대체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 하는 교육으로 짓눌린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일주일이란 어떤 것인가? 월요일의 아이는 피곤하고, 화요일의 아이는 졸립다. 수요일의 아이는 더 졸립다. 목요일의 아이는 눈이 무겁고 금요일의 아이는 온몸이 무겁다. 토요일의 아이는? 토요일의 아이는 퉁퉁 부었네, 다.”

모두 자본의 치즈에 붙어먹고 사는 벌레들로 길러가는 교육이다. 이 경쟁에서 밀리면 아예 치즈 구경조차 하지 못한다고 위협 당한다. 현실 전체가 이런 모양으로 굴러가고 있다. 이러면서 배타적인 특권의 성채는 더욱 견고해져간다. 이들에게는 누구도 도덕과 윤리를 묻지 않는다. 힘의 크기만 궁금해할 뿐이다. 윤석열을 우두머리로 하는 검찰 파시즘은 이런 사회에 그 뿌리를 박는다. 돈을 집어삼키는 재주는 뛰어나고 법으로 자신들을 지키는 무기가 되게 하는 기술 또한 징그러울 정도로 숙달되어 있다.

문제는 이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국민들은 '무기의 소지'가 아예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건 불법이 된다. 공권력이 자신을 위협하고 궁지에 몰아대면 이를 막을 무기를 손에 들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폭력은 국가가 독점하는 것이 합법이고, 이에 맞대응하는 시민의 무장을 통한 폭력의 발동은 범죄인 동시에 반윤리적인 것으로 교육된다. 이런 현실에서 치즈에 붙은 벌레를 잡아떼는 것조차 불법적 폭력이 된다.

미국의 군사주의세력은 자신의 군사력이 ‘민주주의를 위한 무기고(arsenal for democracy)’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제국의 폭력일 뿐이다. 이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약소 국가의 군사력은 ‘불량국가’ ‘악의 축’이라고 난도질 당한다. 이 문법은 국가 내부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경찰과 군대, 프로파간다 언론을 무기로 삼는 파시즘 국가는 보다 노골적이다. 시민의 무장은 토벌대상이다. 파르티잔 투쟁은 그런 운명과 싸우는 시민군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대에 파르티잔이 되거나 도시 게릴라 무장투쟁을 꿈꾸는 이들은 없다. 그건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아니고 무력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법과 제도로 보장된 폭력의 독점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쥐고 국민들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빈 손으로 승리할 방법 또한 없다. 한 쪽은 완전 무장하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비무장이라면 판세의 결과는 뻔하다.

시민의 무장을 위한 ‘정치적 무기고’ : 촛불의 정치세력화

여기서 방법은 하나뿐이다. 시민의 정치적 무장, 또는 시민의 ‘정치적 무기고’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민주당은 정치적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 무력했다. 시민들이 후방 보급대를 맡아 온갖 무기와 식량을 최대한 공급했지만 안이할 정도로 기득권 정치판에 흡수되어 버렸다. 2016년 촛불혁명 이후 이들의 집권과 이후의 결과가 그 증거다.

결국 이 과제는 촛불에게 맡겨졌다. 촛불의 정치세력화, 새로운 판을 짜고 새로운 꿈과 주제, 수단을 마련하는 것만이 돌파구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정치적 무기고’는 빈약하거나 비어 있게 된다. 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불법이 아니다. 정치적 무장을 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시민은 없다. 우리의 ‘정치적 무기고’를 지금보다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본의 치즈에 들러붙은 벌레들과 그 치즈로 우리를 농락하고 있는 체제는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이 싸움은 누가 주인인가의 싸움이다. 주인과 노예의 투쟁, 그 자체다. 반드시 판가름이 나야 한다. 무기의 불평등부터 깨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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