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대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점들
선진국이지만 아직도 반공의식에 갇혀 있는 이중성
대한민국은 매우 모순으로 가득 찬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광복 직후인 1946년 38선 이남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약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약 7%가 공산주의를 지지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합치면 3/4 이상의 국민이 사회주의적 사회를 희망한 셈이다. 매우 충격적인 수치다. 현대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서는 이 조사 결과를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민족적 의식을 가진 부모 밑에서 자랐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는 조선학교에 다녔고, 정치적인 사유로 중학생 때 일본학교로 반강제적으로 전학했다. 고등학교는 도쿄 신주쿠의 ‘도쿄한국학교’에 진학해 1981년부터 서울에 모국 유학을 하게 되어 격동의 80년대를 한국에서 보냈다.
그런 경력 때문인지 한국 정부의 민족을 폄훼한 과도한 반공정책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다. 다만 나에게 이 시대는 공포의 시대였고 잘못하면 감옥에 가게 될 가능성이 내포된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사회에 순응했다.
그로부터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에는 아직도 ‘반공’을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소련이 붕괴된 지 30년이 흘렀다. 중국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세계 최대 시장이 됐고, 한국은 그 덕분에 경제발전의 원동력을 얻었다고 나는 그렇게 판단한다.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를 극복하고 민중의 힘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 역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이후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반공사회'로 회귀했을 뿐만 아니라 세월호 침몰사건(2014년 4월 16일 발생)을 계기로 한국인의 의식에 의도적으로 새로운 분단의식이 삽입된 것처럼 보인다.
피해자 부모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벌인 단식 투쟁에 대해 바로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비웃으며 폭식하는 퍼포먼스가 자행됐다. 이 행위는 ‘반공반북’을 내세우는 기존 우파와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형태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느낀 순간이다. 동원된 실행대원이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언뜻 일반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정부에 불만을 표출하는 자는 적대시되고 혐오의 대상이 됐다. 이때부터 기득권에 항거하는 자들을 적대시하는 구조로 변화한 것 같다. 이 사건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혐중 시위를 하는 2030세대와 유사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기점이라고 해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원래 모든 책임을 '북한'으로 결론 내린 사회다. ‘반공반북’을 외치면 기득권층의 범죄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 사건은 현장에서 실황 중계되어 침몰한 지점이 북한과 연결시키기에는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2022년 10월 29일 핼러윈 날 발생한 이태원 참사도 북한의 음모설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혐중 시위는 원래대로라면 북한을 대상으로 해야 하는데 그것이 전략적으로 중국으로 대체됐다. 이번 내란 쿠데타에서는 실질적으로 북한과의 전쟁 유발도 계획된 점에 부담이 있기 때문에 타깃을 중국으로 대체했을 것이다. 이들은 세월호 참사 여론공작의 성공 사례에서 배운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일본에서 제3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관찰해 왔다. 한국과 일본은 매우 닮은 점이 많다. 어떻게 보면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사회라고 본다. 한국의 광복, 일본의 패전 전후에 일어난 사회적 사건, 악질한 기득권층은 살아남고 현대에도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구조는 판박이다.
나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에 대해 조사해봤는데, 일제의 패전으로 소멸된 '만주국'의 파벌이 현대 일본의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고, "한일기본약(1965년)의 내막을 말한다!"라는 자료집으로 그 조사 결과를 정리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만주국이 현재 한국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한국 사회와 일본 사회의 각각의 문제점에는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옛 만주국에 있던 일본제국군관학교 졸업생이 한국군의 창설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점, 광복에 따라 만주국에 거주하고 있던 코리안이 일제히 한반도로 돌아오는데, 38선의 이북 주민도 이남으로 대거 이동했다는 점 등이다.
이때 이북 측에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지주층, 특히 기독교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한국 기독교의 일대 세력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이북 출신 건달들도 남쪽에서 세력 다툼을 벌였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백색테러에 가담하였다.
탈북 월남자들은 점령군인 미군의 ‘반공정책’에 호응해 빨갱이 사냥의 실행부대로 활약한다. 원래 외지인일 뿐인 이들에게 자본주의 진영인 한국에서 거주하는 데 있어 유일한 정당성이 ‘반공’이었고, 이를 입증하는 행동이 ‘빨갱이 사냥’이었다. 이들중 일부는 일제시대에는 식민지 통치에 협조 부역한 친일파이기도 했다.
광복후 6·25전쟁에 이르는 기간에 군·경찰·서울대·대통령·국회까지 장악에 성공하는데, 그 기득권의 명맥은 대교회를 축으로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리고 현대...
우리 민중은 민주주의 쟁취 투쟁을 계속해 대통령 직선제를 비롯한 온갖 차별적 제도를 개선해 왔지만 그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고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최근에는 우파 교회를 기반으로 반격이 일어나고 있어 한국의 젊은이들은 분단되어 버린 것처럼 보인다. 우리 사회를 뒤덮은 공기는 두 갈래로 갈라져 기존의 공기와 새로운 공기가 섞이지 않고 혼재돼 양립할 수 없는 가치관이 서로 부딪쳐 침체된 이상한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기는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물질이다. 체내에 들어 오는 공기는 신선한 것이어야 하며, 낡은 공기를 계속 들이마시면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그 인간은 절명하고 말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이 낡은 공기를 뿜어내고 순환시켜 주기를 바란다.
나는 내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할 생각도 없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 안에서 거세지는 모순과 갈등을 참지 못하고 한국 근대사를 일본에서 태어난 제3자의 시각으로 검증해 보기로 했다. 그 검증 자료가 '한국 기득권 세력의 실상'이라고 본다.
외지에서 한국을 관찰해 보면 특수한 가치관이라고 느끼는 것이 군대식 사고방식이다. 예를 들어 70년 넘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병역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세계 최강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북한의 국가예산을 훨씬 웃도는 국방예산을 쓰고 있는데 북한을 일관되게 '위협'으로 삼고 있다.
게다가 북한에는 다른 나라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지 않다. 지금은 핵무기 보유국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재래식 무기로는 현격한 차이가 있고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으니 위협으로 간주하는 사태에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병역이라는 큰 의무를 치르면서도 그 대가에 무관심하다. 한국군의 창설시에는 일본군의 장교가 그대로 이입하고 있었으며, 특히 만주국군과 이북 출신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반공·반북'이야말로 그들의 존재가치이며, 국내에서 적대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빨갱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어 전파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북한과의 교류나 평화통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관이었다.
최근 이슈가 됐던 북파공작부대 HID를 비롯해 해병대와 각 특수부대, 국정원과 각 정보기관의 창설 멤버 상당수가 이들로 구성돼 있었다. 2014년 4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중국에 소재한 북한식당 류경식당 여종업원 12명(총 13명)이 탈북해 귀순했는데, 이 공작에 HID 부대원들이 연루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에서 우파 개신교가 폭발적으로 급증한 배경에는 일정기간 국군 내에서 개신교 권유가 기획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으로 간주 된다. 남한 내에는 북한과 교류를 저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하며, 그 숙주가 군대라고 간주된다.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찰쿠데타와 사법쿠데타는 서울대법대 카르텔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엘리트층인 그들의 비정상적인 처신, 공작을 마다하지 않는 행태는 기저에 깔린 군대식 조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 뿌리로 서울대학교 창설 때인 1946년 발생한 국립대학교 대안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량의 퇴학자 대신 탈북해 월남한 이들이 대거 입학한 것으로 의심된다.
이들이 제주도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유명한데, 1948년 여순사건에는 만주의 일제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동포 항일독립군이나 민간인을 학살하던 자들이 한국 땅에서 다시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그 대표적 인물이 최초 4성장군인 백선엽이며 남로당에 잠복한 프락치일 가능성이 큰 박정희 대통령이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민중항쟁 진압에도 이들은 깊이 관여하고 있다.
광복 후 한국에서는 백색테러가 횡행하였는데 국립대학교 대안사건 진압(1946)-대구민중항쟁 진압(1946)-제주 4.3학살 사건(1947-1954)-여수순천학살사 건을 각 단독의 사건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재검증하고 체계적으로 해명할 필요가 있다.
625전쟁 초기에 남한 내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 그리고 625전쟁 때 북쪽 영역에서 실행된 학살 사건에도 이들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이에 반해 그 많은 자가 현충원에 묻히고 그 일족은 국가로부터 온갖 혜택을 받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차세대에게 밝은 미래를 가져다 주기 위해서도 광복후 625전쟁에 이르는 역사를 다시 검증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그 사실을 숨김없이 공개하고 국민에게 알려줌으로써 우파 기독교, 엘리트 편중주의, 병역제도, 국가보안법 등 한국사회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들에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평화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고 상대를 존중하는 준비가 갖추어지면 남북 교류의 문이 열리고 남북의 평화 발전의 길이 열릴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80년 늦었지만 진짜 광복의 도래가 아닌가...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