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 그릇 훔쳐 먹은 죄'로 한국판 장발장

[고아시설 피해자들] 오류마을 출신 송준영 씨

미아였을 뿐인데 경찰은 고아원에 넘겨

입소후 관리자에 의해 7세까지 성폭행 시달려

후원자의 시계도둑으로 몰려 2박3일 맞기도

폭력에 시달려 중2때 고아원 탈출, 노숙자생활

밥 한그릇 훔쳐먹고 다른 사건까지 덮어써 소년원행

"고아산업 중단하라" 한강대교 오르고 각종 시위 참여

2025-11-24     이득신 작가

이득신 작가가 고아시설 피해자들의 얘기를 연재한다. 작가는 고아와 미혼모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갖고 그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운동을 벌여왔다. 스스로 입양부모가 되어 그들의 실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그는 이 연재물을 통해 고아시설 피해 문제를 국가 폭력과 탈시설의 관점에서 들여다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송준영 씨는 1970년 10월 5일생이다. 출생등록이 없는 고아원의 원생들은 고아원의 추정에 따라 생년월일이 정해지고 원장의 성을 따라 성이 부여된다. 송 씨 역시 그렇게 ‘고아호적’이 만들어졌다.

그의 고아인생은 집 근처 놀이터에서 울고 있을 때 경찰이 그를 파출소로 데려가면서 시작됐다. 당시엔 미아가 발생하면 부모를 찾아주기보다 보호소에 맡겼다. 경찰이 이런 방식으로 수당을 챙기던 시절이었다.

그는 부랑아선도차량에 실려 대방동의 서울시립아동일시보호소로 옮겨진다. 1974년 11월 14일의 일이다. 그곳에서 그는 많이 울었다. 울면 약을 먹였다. 약을 먹으면 잠이 들었고 일어나면 대소변이 흥건하게 옷이며 이불에 젖었다. 관리자로 보이는 어른들은 똥오줌 못 가린다고 때렸고 울면 다시 강제로 약을 먹였다.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검은색 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의 고아원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오류애육원(현, 오류마을)의 입소기록도 시립아동일시보호소에 맡겨진 날과 같은 날(1974년 11월 14일)이다. 보통 보호소에서 최소 2 ~ 3개월에서 최대 2년까지 머물렀다는 주변 고아원 출신자들의 증언을 기준으로 볼 때 오류마을 입소기록은 가짜일 가능성에 그는 무게를 두고 있다. 그의 법적 기록은 이렇게 조작되었다. 그는 지금도 국가와 고아원이 만들어준 임의의 기록으로 살고 있다. 고아들의 부모찾기를 가로막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고아원에서 만들어준 임시호적 때문이기도 하다.

 

오류애육원 입소당시 송준영씨의 수용자 신상카드, 보호자 송석도 원장의 1974년 당시 월 수입과 재산이 눈에 띈다.

“오류마을로 실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이라는 여성관리자가 3일에 한 번씩 당직을 섰는데, 그때마다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 가서 함께 잤어요. 처음엔 꼭 안고 자기만 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유사 성행위까지 강요했습니다. 거부하면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습니다. 그렇게 7살까지 성폭력에 시달렸어요. 4~ 살 어린 나이라면 기억이 또렷하지 않을 법도 한데, 다른 건 흐릿해도 성폭력 당한 것은 지금도 아주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너무 충격적이기 때문일 겁니다. 원장(관리자)이 ‘왜 (송)준영이만 데리고 자느냐’는 지적에 그녀의 성폭력은 사라졌지만 선배들의 성폭력은 계속되었고 그 여자는 이후 다른 원생을 데리고 잤습니다.”

자신을 성폭행한 그 관리자는 어느 날 선교사와 결혼한다며 고아원에 예비 신랑을 데리고 인사하러 왔는데, ‘저런 사람도 결혼을 하는구나’라는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또한 성인이 되어 해당 고아원을 찾아 성폭력 사실을 지적하자 그곳의 원장은 “네가 예뻐서 함께 잤을거야”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렸다.

고아원 생활은 지옥이었다. 늘 배가 고팠다. 배급 양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이유도 모르는 잘못을 저지를 때면 벌칙으로 굶어야 하는 날도 많았다. 언젠가 관리자가 식자재 창고의 문을 잠그지 않은 날, 내부에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재료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쌀이며 과일 같은 식자재들이 차고 넘치는데 원생들은 배고픔에 시달린 것은 관리자들은 그 재료를 몰래 빼돌려 자기 집으로 가져갔기 때문이다. 폭력은 더욱 끔찍했다. 선배들의 폭행은 기강을 잡는다는 구실로 묵인됐다. 너무 많이 맞아 힘들고 죽을 만큼 아픈 어느 날 폭력당한 사실을 관리자에게 말했더니 그 선배를 벌주기는커녕 더 심한 매질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도 정수리 부근에 반달모양의 상처가 있다. 맞아서 몇 번 찢어진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한 흔적이다. 폭력의 상흔이 온몸 구석구석 남아 있다. 척수손상과 공황장애가 그렇다.

“오류애육원에서는 방학 때 후원자들을 모시고 고아원 체육대회를 했습니다. 당시, 외부에서 온 여자아이의 전자시계가 없어졌는데, 마침 제가 그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도둑으로 몰려 2박3일간 맞았어요. 어디에 숨겼는지 사실대로 말하라며 온갖 폭력이 이어졌습니다. 맞는 게 너무 힘들어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톱밥 창고에 숨겼다, 어디 구석에 숨겼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도둑이 아니기에 당연히 찾을 수가 없었고, 더욱 심한 매질이 이어졌지요. 결국 시계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는데, 그 여자아이의 집 책꽂이 사이에 있었다는 겁니다. 누명을 벗었지만 저에게 사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만, 더 이상 안 맞아도 된다는 게 그저 기쁠 뿐이었습니다.”

반복되는 구타가 견딜 수 없어 그 곳을 탈출하고 다시 붙들려 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그는 지속적으로 탈출을 기도했다, 결국 85년 7월인 중학교 2학년, 그곳을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혼자 도망쳤지만 당시 둘이 도망쳤다고 오류애육원 공식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조작된 것이다.) 탈출 후의 고난은 더욱 심했다. 몇 달 간 노숙자가 되어 오류동과 그 일대를 떠돌았고, 4일이나 굶은 날도 있었으며, 흘리거나 버려진 음식을 찾아 헤맸다. 밭에 심어진 무(1985년 무렵에는 오류동을 비롯한 구로구 일대에도 논밭이 많이 있었다)를 뽑아 먹으며 허기를 달래야 했다. 식당 근처를 맴돌며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었다. 잠은 화장실 구석, 임시창고, 정화조 등에서 잤다. 그해 11월경, 빈집에 몰래 들어가 밥을 훔쳐 먹다 주인에게 발각되어 송준영 씨는 경찰에 넘겨진다.

 

송준영씨가 오류애육원을 이탈했다며 구로구청에 보고된 서류. 함께 도망쳤다는 기록은 명백한 조작이다.

“밥 한 그릇 훔쳐 먹은 죄로 다른 범죄까지 나에게 덮어씌워 소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당시 구로구 일대 절도 같은 미제 사건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현금, 귀금속, 카메라 등 미해결 도난 사건의 범인이라며 경찰에게 물고문을 비롯하여 엄청난 고문과 구타로 자백을 강요당했습니다. 유치장, 취조실뿐만 아니라 경찰서 사무실에서도 무지막지한 주먹이 날아오더군요. 더 이상 맞지 않기 위해 경찰이 불러준 대로 진술하고 서명날인 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에는 멀쩡한 대학생들도 간첩으로 몰리는 판국이었는데, 저 같은 잡범들이야 오죽했겠어요? 지금 같으면 합의 하에 훈방조치 될 사안인데, 당시 경찰은 ‘너는 어차피 고아니까 소년원이나 가라. 여기서 (범죄) 몇 개 더해진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고 하며 저에게 모든 미해결 절도사건의 죄목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대전소년원에서 1년 6개월을 보낸 뒤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분노와 원망에 사로잡혀 걷잡을 수 없는 전과자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모두 6차례 10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가히 한국판 장발장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다. 공장에 취업도 했지만 고아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취업하고 잘리기가 반복되었다. 고아들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어렵고 기술습득은 더욱 힘든 이유가 바로 ‘고아’라는 사실 때문이다. 이후, 빚을 내어 소형 트럭을 준비하고 당시 막 인기를 끌던 퀵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친구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예쁜 딸을 얻었다. 고아에게 ‘혈육’이 생겼다는 느낌은 ‘피를 나눈 가족’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외도로 삶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이혼을 했고, 아내에게 친권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는 막막함 때문에 아이를 고아원으로 보내야 했다. 시간이 흘러 딸을 데려와 지금은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그는 50 ~ 60대 나이 고아원 출신자들의 고달프고 전형적인 삶을 살았던 셈이다. 국가의 잘못된 시스템으로 인해 ‘고아’가 되고 ‘전과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구로구 일대에 인구가 늘면서 신설학교인 오류남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친구들은 가까이 오는 것을 피하는데, 나에게 도시락을 나눠주던 친구가 있었어요. 노숙자 생활 할 때는 잠 잘 곳을 찾아 헤매다가 소금창고 곁에서 소금가마니를 뒤집어쓰고 자기도 했는데, 그 때 비닐봉투에 밥을 싸다 준 친구가 있었어요. 김경숙이라고. 20대 초반에 그 친구의 집을 찾아갔더니 강릉으로 시집갔다고 하더군요. 나에게 처음으로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해 준 그 친구가 지금도 보고 싶습니다.”

 

아동복지협회가 주관하는 세미나장 앞에서 고아산업 중단 1인시위를 벌이고 있는 송준영씨

송 씨는 고아원 피해자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덕성원과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국가와 지자체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며 그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펑펑 울었다. 그리고 고아수용시설 피해자들과 연대하여 싸워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기 시작한다. 그는 지난 6월 11일 한강대교에 올랐다. ‘정부와 서울시는 아동 집단수용시설에서 국가폭력을 당한 피해 생존자의 진실을 규명하고 배상하라’고 외쳤다. 고아원 탈출 40여 년, 중년이 된 송 씨가 서울에도 폭력을 저지른 아동 수용시설이 있었음을 알리고 정부와 서울시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소식을 듣고 현장에 나간 서울시청 관계자들이 면담을 제안하며 설득하자 그는 6시간 만에 땅을 밟았다. 그의 한강대교 고공농성은 몇몇 언론사에서 소극적으로 다룬 것을 빼곤 실시간 교통정보에서 교통정체가 발생했다는 라디오 뉴스가 전부였다.

“고아수용시설에서 자행되었던 아동폭력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고아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우리의 이야기는 가십거리로 묻혀버려요. 결국 한강대교를 택한 것입니다. 1970~80년대 국가는 ‘고아 산업’을 장려했고, 발생한 미아의 부모를 찾아주는 대신 고아원으로 넘겼습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을 받는 시설에서는 아동학대와 폭력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걸 사과하고 배상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오류애육원은 전쟁고아 수용시설로 출발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오히려 성장을 거듭했다. 국가의 지원금과 민간 후원금으로 부를 축적하고 아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각종 위문품과 격려금은 운영자가 착복했다. 건물을 신축할 때는 그곳의 원생들이 총동원되어 벽돌을 나르고 삽질을 강요 당했다. 원장은 또한 용인에 대형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한쪽에는 축사와 논, 다른 쪽에는 소의 사료로 먹일 옥수수 밭을 운영했다. 당시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노동체험 한답시고 아동들을 용인으로 끌고 가 모내기와 벼 베기, 소 사료 만드는 일을 시켰다. 명백한 불법이었지만,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오류애육원(오류마을)은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원장, 국장, 직원 2명 등 총 4명이 구속되어 처벌받은 사례가 있는 곳이다. 몇년전까지 아동학대, 약취유인, 배임횡령, 성폭행, 성추행이 자행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는 해당 보육원이 폐쇄대상이라는 의미이지만 아직도 시설은 건재하다. 기독교 정신에 의거하여 설립된 시설이라며 지금도 해당 시설의 홈페이지는 ‘행복, 사랑, 미래’같은 아이러니한 단어가 넘쳐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송석도 원장은 오류애육원 원생들을 자신의 농장에 동원하여 강제노동을 시키기도 했다.

한국아동복지협회는 보육원(고아수용시설)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시설들의 연합단체다. 고아원 운영자들은 대체로 기독교 정신 등을 내세워 해당종교의 가르침으로 시설을 운영한다지만 실상은 종교재벌, 사학재단, 부동산 재벌이 모여있는 단체의 위선적인 이름일 뿐이다. 11월 9일에는 일산의 킨텍스에서 아동복지협회 주관의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주제 중 하나가 ‘지속 가능한 시설의 발전방안’이었다. 송준영 씨는 이날 세미나가 열리는 곳 입구에서 ‘고아산업 중단’을 요구하며 동료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아동복지 선진국은 우리 같은 집단 수용시설, 고아원이 사라진지 오래이며 가정식 ‘그룹홈’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나라는 보육원이라는 이름으로 성업 중이다.

저출생과 인구감소의 여파에서도 고아수용시설은 2023년 기준 245개가 운영 중이다. 송준영 씨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류마을은 2025년 4월 현재 45명의 원생이 머물고 있다. 그런데, 원장을 비롯한 직원들은 39명이다. 원생의 숫자로 본다면 저출생의 여파를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직원의 숫자로 본다면, ‘물반 고기반’이라는 속어가 떠오른다. 인건비와 시설유지운영비, 보육 및 교육비 등으로 고아수용 시설은 국가와 지자체로부터 월 1인당 400만~5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으며 운영된다. 각종 후원금과 위문품 등을 더하면 훨씬 더 많은 돈이 고아수용시설로 흘러간다. 시설의 원생 중 천애고아보다 빈곤 가정 등 위탁아동이 80~90%를 차지한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국가는 시설에 지원하는 대신 원가정 보호에 더욱 힘써야 하며, 탈시설을 위한 정책을 서둘러야 한다. 고아라는 이유로 더 이상 송준영 씨 같은 억울하고 참혹한 피해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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