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콘텐츠가 IMF를 기억하는 방법
120년 굴곡 진 한국 역사가 K-콘텐츠 자양분
비교적 늦게까지 다루어지지 않은 IMF 환란
환란 14년 지나서야 '응답하라 1997' 등장
관료들 책임 다시 확인한 '재벌집 막내아들'
올 드라마 수작은 소통 다룬 '은중과 상연'
긍정적이고 낭만적인 회복 서사 '태풍 상사'
언어장벽 무너뜨리는 대한민국 근현대 위기 서사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근현대의 질곡들은 아이러니하게도 K-콘텐츠의 가장 훌륭한 소재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공유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12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독립전쟁을 비롯해 온갖 학살과 참사, 분단과 내전, 쿠데타와 내란들까지 겪어야만 했다. 이들은 강력한 연대를 통해서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를 위해 끝없이 자발적인 헌신을 이어 가면서 마침내는 더욱 성숙한 민주주의와 공동체성을 쟁취했다. 따라서 이들의 서사는 오늘의 위기들을 진단하는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사례와 영감을 제공한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위기와 관한 서사들은 충분히 매력적인 콘텐츠가 될 수 있지만 그에 더해 서사와 관련되어 이미 향유하고 있는 콘텐츠들도 풍족하다. 위기 극복 과정 중에서 얻게 되는 고통과 상처를 정서적으로 치유하려고 노력했고, 이런 시도가 다양한 문화적 성취들까지 일궈냈던 것이다. 이들은 새롭게 창작할 콘텐츠의 레퍼런스로도 활용할 수 있지만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배치할 수만 있다면 그 시대로 담박에 돌아가게 하는 타임머신처럼 활용할 수도 있어 매력적인 장치가 된다. 이런 장점을 가장 잘 활용한 콘텐츠가 바로 <응답하라> 시리즈다.
다른 문화권에 콘텐츠가 수출되는 경우에도 근현대 위기 서사는 쉽게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대한민국 근현대 위기 서사들은 대다수 문화권에서도 비슷하게 겪었거나 앞으로 겪을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개연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이야기에 자연스레 몰입할 수 있는 환경도 제공한다. 특히 K-콘텐츠에 개방적인 소비자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더 깊이 알고 싶어 하는데, 근현대의 사건 사고들을 소재로 다루게 되면 이들의 콘텐츠 파고들기(Content Digging) 소비를 촉발하게 된다. 관심 있는 사항에 대해서는 덕질 하듯 깊이 파고들면서 소비를 하는 이 현상은 콘텐츠에 대한 충성도를 높인다. 최근에 한국 드라마가 1960년대부터 밀레니얼 시대까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관료들 IMF 환란 책임을 정면 응시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
흥미로운 것은, 이런 큰 장점에도 97년에 벌어진 한국의 IMF 위기를 본격적으로 다룬 콘텐츠들은 최근까지도 극히 적었다는 점이다. 특히 아시아 권역에서는 예외 없이 겪은 대형 글로벌 위기였고, 전쟁의 위기 때에도 공고했던 가족 공동체 개념까지 박살 내면서 극단적 경제 양극화를 초래한 사건이었음에도 콘텐츠로의 본격적인 기록은 무려 20년이 지나서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물론 2000년대 이후 창작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콘텐츠에는 이 위기의 흔적들이 존재한다. 80년 이후 대다수의 콘텐츠에 광주 학살의 흔적이 그림자처럼 늘어 붙어 있었던 것처럼. 초기 작품들은 영화 <아버지>처럼 직접 사건 자체를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IMF 사태로 인해서 피해 입은 사연을 지나치게 개인화한 뒤 신파로 장식해서 구조적 원인을 알 수 없는 작품이 많았고, 극복의 책임까지도 가족공동체에게 떠넘기는 이야기들도 많았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7>에 이르러서는 90년대 초반의 풍요로움과 97년의 비극적 상황을 잘 대비시키면서 일종의 풍속화처럼 담담히 공동체 서사를 이끌어 갔는데, 이런 여유가 14년이 지나서야 생겼다는 것은 그만큼 IMF 사태가 크고 깊은 상처를 남겼음을 반증한다. 이 작품은 청춘들에게 특히나 절망적이던 당시 상황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도피처이자 치유의 공간이 되었던 초기 KPOP 팬덤 공동체에 대한 성실하고 낙관적인 묘사를 통해 그들의 상처를 우회적으로 기록했는데, 오히려 IMF의 후유증과 그 이후의 변화된 문화를 효과적으로 기록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후 우리 콘텐츠는 더욱 다양한 시각과 화두로 IMF 사태가 우리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했는지 기록했다. 영화 <기억의 밤>은 스릴러 장르로 IMF 이후의 불안과 공포를 깊이 탐구하면서 <국가 부도의 날>이 행한 정면승부를 예고했다면,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 와서는 <국가 부도의 날>이 규정한 정부와 관료들의 책임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역사를 바꿔보려는 시도를 통해 시청자들을 대리만족하게 한다.
무엇이 사람 사이 소통을 가로막는가를 드러낸 <은중과 상연>
한편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IMF의 전조였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모티브 삼아 쓰여진 작품인데 깊이 남겨진 후유증에 대해 꼼꼼히 파고들면서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예고했다. 사실상 올해 최고의 드라마 중 하나인 <은중과 상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무엇이 가로막는지를 촘촘하게 드러내 준 수작이었다. 은중과 상연의 소통을 방해했던 것은 처음에는 8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사회적 양극화와 경쟁으로 내모는 학교였다. 여기에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얹어지면서 아버지가 없는 은중과 부모가 있지만 사랑을 못 받는다고 느끼는 상연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추가한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소통의 오류들을 바로잡을 여유가 있었고, 그들은 오히려 서로의 부족한 것을 채우며 공동체의 힘을 만끽한다.
이 때 IMF가 터진다. 상연이 아버지는 회사가 어려워져 집안에 더욱 소홀한데, 상학은 부모들로부터도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극단적 선택을 한다. 상연은 편애를 누리던 오빠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지 못하니 도통 이해가 불가능한데, 오빠는 자기가 아닌 은중에게 아끼던 사진기를 선물했고, 아빠는 상연에게 아무 설명 없이 가족을 떠났으며, 엄마는 아들과 아빠를 한꺼번에 잃고 아예 정신을 놓았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의 제작진은 IMF의 피해를 직접 세세히 묘사하지 않았지만, 관계가 박살난 한 중산층 가족의 가장 어린 구성원을 통해 그 상처가 이후 사람을 어떻게 바꿔 버리는지를 추적 관찰함으로, 더 깊이 고통에 공감하게 만든다.
은중과 상연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혈연이 아닌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가 여전히 울타리 역할을 했는지 아닌지의 차이였다. 은중은 삼촌과도 같이 장사를 할 수 있을 만큼 기초적인 인간관계가 튼튼했기에 배려와 믿음을 토대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미래에 대한 낙관을 가지고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상연은 철저히 혼자였기 때문에 누구에게 빚을 질 수도, 정을 나눠 줄 수도 없었다. 이용하고 부딪히고 승부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어쩌면 IMF 사태로 본격화 된 신자유주의는 그런 인간들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상연이 성공한 제작자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IMF 다룬 서사 중 가장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태풍상사>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태풍상사>는 <국가부도의 날> 만큼 정면으로 IMF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원인과 구조적인 문제 해결보다 구성원 다수가 각자 어떻게 망가졌고 다시금 일어났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혹자는 이 서사를 위기를 극복해내는 영웅 서사라고 섣부르게 판단할지 모른다. 하지만 <태풍상사>는 자기 욕망과 꿈에 충실했던 애송이가 가족과 동료를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바로 세우며 스스로 성장하고 치유되는 회복 서사다. 어쩌면 IMF를 다룬 서사 중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콘텐츠라 볼 수 있다.
<태풍상사>는 천재지변과 같은 재난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했을 때, 맨 처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자신과 함께 위기를 견딜 ‘사람’을 찾으라는 것이다. 주인공 강태풍은 가족 중에서 어머니를 찾았고, 아버지의 직장에서 오미선 주임을 찾았다. 강태풍은 오미선에게 상사맨의 꿈을 이루게 해 주었고, 오미선은 자신의 집으로 태풍의 가족을 들여 확장된 가족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는 가장 한국적 방식의 재난 극복 메뉴얼이다. 가족이나 이웃 중 조금 더 가진 사람이 먼저 품을 열어 다른 구성원들을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이들의 강화된 생산력과 다양성에서 발현되는 창의력이 공동체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게 되고 생존에 필요한 비용은 최소화된다. 이렇게 재난을 극복하면서 더 큰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어 성공한 콘텐츠가 바로 <응답하라 1988>이다. tvN은 그 DNA를 고스란히 <태풍상사>에 녹여서 다시 성공한 IP를 만들고 있는데, 이런 시도를 줄기차게 이어 나갈 수만 있다면 tvN의 정체성으로 인식되면서 성공적인 브랜드로 세계 시장이 주목하게 될 것이다.
<태풍상사>의 선택과는 달리 IMF 사태 당시 다수는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도생하는 것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대개 기본 공동체마저 해체되게 만들어 수많은 ‘상연’을 생산했을 뿐이었다. 혹자는 디아스포라를 예로 들며 해체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하기도 하지만 이는 디아스포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어설픈 적용이다. 디아스포라는 기억, 역사, 문화, 정체성을 유지하는 ‘집단’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상연은 그 집단에 속하지 못했거나 그것을 거부했기에 외톨이로 견딜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죽기 전에 기본 공동체로의 회복이 필요했던 것이다. 은중에게 찾아와 털어놓는 고백은 어쩌면 회복의 의식이기도 하다.
생존하면서 사랑 확인하고 상처 치유하는 매력적인 서사
상연이 스스로를 어리석었다고 하는 것은 다수의 선택과는 달리 <태풍상사>처럼 선택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많은 공동체 실험이 그 시기에 진행되었다. 육아 공동체, 마을 공동체, 예술 공동체, 돌봄 공동체 등 주로 협동조합의 형태로 진행된 이 움직임은 혼자 혹은 한 가족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냈다. 서로의 짐을 나눠지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식 위기 해결 방법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지 조합원들은 체험을 통해 깨달았고, 그들은 민주주의를 더 깊이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했으며, 신자유주의의 광풍을 견딜 교두보로 자리잡기도 했다. 물론 <태풍상사>에도 다뤄진 것처럼 겉으로는 공동체를 표방하며 실제로는 개인에게 이득을 집중시키는 사기꾼들도 이때 창궐했다. 다단계 피라미드 사기나 사이비 종교집단의 사기 행각들은 공동체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드라마 <태풍상사>의 덕목은 이 모든 상처와 고통, 도전과 실패를 성실히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도생으로 흩어졌던 상사 직원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묘사된 각자의 극복을 위한 선택들은 당시의 생존 법칙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탁월한 능력으로 자기 역할을 해 내는 커리어 우먼들의 서사를 촘촘히 엮어 재미를 주고 있는데, 그들까지도 빠짐없이 성장시키고 있는 뚝심이 만만치 않다. 그러니 애초에 이 작품은 이준호의 영웅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놀라운 생존력을 보여주던 <파칭코>의 김민하가 해석한 IMF 생존기인 것이다. 이제 막 책임감을 깨달은 초보 사장과 늘 책임감으로 회사와 가정을 떠받치고 있던 완숙한 경리가 동지로 성장하면서 태풍상사를 재건하고 흩어진 동지들을 모아 회사를 성장시키며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 이런 서사가 매력이 없을 수 없다. 우리 드라마 콘텐츠들이 대중성을 확장시키면서 이 수준까지 이미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