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기자들은 그때 그때 달라요

일관된 건 악의 가득한 ‘이재명 혐오’ 프레임뿐

2025-11-18     송요훈 편집위원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송요훈 편집위원(전 MBC 기자)

‘기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빠진 적이 있다. 나의 결론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정직함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판단력이었다. AI에게 인간 판사와 AI 판사의 장단점을 알려달라 했더니 AI 판사의 장점 중에 ‘감정 개입 없이 오직 입력된 데이터와 법률에 입각한 판단을 내리므로 판사 개인의 주관적 편향성을 배제하고 일관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다’는 답변도 있었다. 판사가 누구든 법원의 판결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일관성이 있어야 예측 가능하고, 예측 가능해야 신뢰가 생긴다. 언론은 어떠한가.

문재인 대통령의 ‘바이든 정찬’은 안 보이고 ‘혼밥’만 보인 조선일보

문재인 대통령은 국내보다 외국에서 더 높게 평가받는 대통령이었다. 스페인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각국 정상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일본의 스가 총리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사진 때문에 일본에서는 ‘외톨이 스가’라며 네티즌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일도 있었다. 스페인 의회는 독도가 우리 영토로 표시된 고지도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여주기도 했었다. 일본보다 한국과 더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표시였다.

 

워싱턴을 방문한 스가 총리에게 바이든 대통령은 햄버거를 대접했다. 긴 테이블의 양쪽에 멀리 떨어져 앉아서 햄버거를 먹었다. 그 이후 워싱턴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바이든은 미국식 정찬을 대접했다. 백악관 발코니의 작은 테이블을 두고 가까이 않아 식사를 즐겼다. 스가 총리는 영빈관에서 묵었고, 문재인 대통령은 호텔에서 묵었다. 영빈관은 그때 수리 중이었다. <조선일보>의 지면에선 미국이 스가 총리를 더 우대했다고 말하고 싶은 뺑덕어미의 심보가 느껴졌다.

<조선일보>는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는 ‘혼밥 외교’라고 비하하고 조롱했다.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보통의 중국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에서 아침 한 끼를 참모들과 같이 했는데, 초청한 중국 측 인사가 없으니 ‘혼밥’이라는 거다. 문재인은 친중인데도 중국에서 홀대받았다는 <조선일보>의 ‘혼밥’ 프레임에는 문재인 혐오와 중국 혐오가 동시에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조선일보>는 왜 그토록 문재인을 혐오했을까?

 

2017년 12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방문 이틀째인 12월 14일 숙소 다오위타이 인근의 융허센장을 깜짝 방문해 중국 서민의 아침 식사로 유명한 유타오로 조찬을 가졌다. 2017.12.14. 연합뉴스 자료사진

똑같은 사안도 박근혜는 다르다, 왜? 같은 편이니까

박근혜 대통령은 미국, 일본보다 중국을 더 중시했다. 적어도 당선자 시절에는 그랬다. 미국, 일본보다 중국에 먼저 특사를 보냈으니까. 2015년에 있었던 중국의 전승절 행사에선 시진핑과 나란히 천안문 망루에 서서 열병식을 참관했다. 그때 중국은 박근혜 대통령을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 자리로 예우했는데, <조선일보>는 60년 전 김일성이 있던 자리이고 북한 대표는 끝자리에 배치했다며 중국이 북한보다 한국을 더 가까운 나라로 인식하게 된 것이라는 해석을 붙인 찬양조의 보도를 했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공식 만찬이나 오찬이 아닌 아침은 혼자 또는 참모들과 먹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했다고 해서 하루 세끼를 모두 그 나라 관계자들과 같이 하는 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랬고 문재인 대통령도 그랬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문재인에게 씌운 ‘혼밥 프레임’을 박근혜에겐 적용하지 않았다. 중국 전승절 행사에 참석했다고 해서 ‘중국 혐오’ 프레임을 가동하지도 않았다. 박근혜가 무서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자기편이라 그랬을까? 후자니까 그랬을 거라는 건,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다.

 

총성 없는 전쟁 중에 “미국 좋아? 중국 좋아?” 다그치다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싸움에 한국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어보는 것처럼 외교는 단순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외교는 국익을 다투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강대국이야 제멋대로 해도 욕이나 먹으면 그만이지만, 약소국은 가랑이 밑을 기는 수모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귀를 간지럽히는 찬사로 환심을 사야 할 때도 있다. 그게 현명한 대처이고 지혜로운 외교다. 등거리 외교니, 전략적 모호성이니 하는 전문적인 용어를 들이대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외교 문외한들도 아는 상식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민주당 대표 시절에 중국과도 대만과도 ‘셰셰(謝謝)’ 하며 잘 지내는 게 우리에겐 이롭다는 말을 했었다. 실리와 실용을 말한 것인데, <조선일보>는 굴종 외교라며 ‘친중’ 낙인을 찍었고, ‘여기도 셰셰, 저기도 셰셰’ 한다고 비아냥거리며 ‘이재명 혐오 프레임’을 강화했고, 보수층의 안보 불안을 자극하며 이재명 후보를 찍지 말라는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셰셰’ 조롱은 멈추지 않았다. <조선일보> 지면에선 ‘이재명은 친중’이라는 극우의 아우성이 트럼프의 귀에 들리기를 바라는 열망이 읽혔다. 혐중 시위는 이재명 대통령이 중국에 셰셰 한 것에 대한 역작용이고, 이 대통령이 중국에 반감을 표현하면 혐중 시위는 사그라들 거라는 황당한 칼럼이 실린 적도 있다.

 

애국가의 가사를 빌리자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미국과의 관세 협상은 우리의 국익을 최대한 지키는 최선의 방어로 타결되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우리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버티는 것이었고, 버티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말이 버티는 것이지 ‘배째라’ 하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지능전이었을 것이다. 트럼프 특유의 ‘거래의 기술’을 탐독하고 치밀한 전략을 준비했어도 밀리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협상이었고, 피를 말리는 심리전이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협상팀은 거칠었지만 훌륭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재명은 탁월한 협상가이고 해결사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이재명이 지금 대통령이라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폭탄주 돌아가도 안보는 튼튼하다는 것이 <조선일보>식 애국일까?

나는 카투사로 미군부대에 근무하면서 애국을 배웠다. 부자나라 군대의 풍요로움은 부러웠고, 가난한 나라의 백성이라 겪어야 하는 차별의 설움은 서글펐다. 나는 그렇게 교과서가 아닌 실전으로 애국을 배웠다.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과의 협상을 소개하면서 종종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대통령의 그 말이 슬펐다. 힘없는 자의 설움으로 애국을 배우던 기억이 떠올라 슬펐다. 대통령이 강대국의 틈에 끼어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어려움을 말하며 나라의 국력을 키우자 할 때도 <조선일보>의 지면에는 여전히 ‘이재명 혐오’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행간에서 외줄 타다 떨어지기를 바라는 놀부 심보가 읽혔다.

한국 사회에서 안보는 보수진영의 전매특허이고, 그 선봉에 <조선일보>가 있다. 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넘어온 노인 세대의 불안심리를 자극하여 인질로 잡아두는 대중 심리전에 관한 한 <조선일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북한의 도발에는 가차 없이 응징하라고 흥분하는 <조선일보>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국방의 핵심 요직에 있는 사령관들과 부어라 마셔라 하며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폭탄주를 돌렸다는 증언이 나왔는데도 별로 흥분하지 않는다. 폭탄주 돌아가는 시간에 국방은 공백이었는데, 그것보다 ‘한동훈을 총으로 쏴서 죽이겠다’고 했다는 윤석열의 취중 발언을 더 크게 보도한다. <조선일보>에겐 나라의 안보보다 한동훈의 신변 안전이 더 중요한가.

 

노상원의 수첩에서 ‘수거’, ‘사살’, ‘폭침’ 등의 군대 용어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섬뜩했지만 퇴역 군인의 망상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현역이던 여인형 방첩사령관의 휴대전화에서 ‘저강도 드론 분쟁의 일상화’, ‘체면이 손상되어 반드시 대응할 수밖에 없는 타겟팅’, ‘평양, 원산 외국인 관광지, 김정은 휴양소’, ‘천재일우의 기회를 찾아서 공략’, ‘노아의 홍수’ 등의 메모가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는 한반도가 불바다가 되는 지옥의 문턱을 넘을 뻔했던 것 같아서 등골이 오싹했었다.

검은 의도와 추정과 악의가 넘쳐나는 ‘대장동 소설’

<조선일보>의 보도는 덤덤했다. 내란 특검이 윤석열, 김용현, 여인형에게 ‘외환유치죄’를 적용하려 했으나 증거를 찾지 못해 ‘일반이적죄’를 적용하여 기소했는데, 의혹에 비해 특검의 수사는 초라하다고 비꼰다. 외환유치죄를 적용하려면 윤석열이 북한과 내통했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하기에 성립 불가능이라 애초에 버린 카드인데 <조선일보>는 법조계라는 익명의 취재원을 앞세워 ‘외환유치죄’를 적용하지 못했다고 내란 특검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다. <조선일보>는 윤석열에게도 북한과 내통했다는 ‘종북 프레임’을 씌우고 싶어 그런 걸까? 아닐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싫고 민주당이 싫고 내란 특검이 싫어서 그런 걸 거다.

검찰이 대장동 사건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포기했다. <조선일보>는 판결이 나온 뒤부터 ‘7880억’이라는 숫자와 ‘범죄수익’, ‘부당이득’, ‘추징금’ 등의 어두침침한 용어를 반복하고 ‘대장동 일당’과 ‘성남시 수뇌부’와 ‘그분’이라는 악의가 담긴 지칭을 섞어가며 이재명 대통령이 범죄집단의 대부라도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

대장동 보도에 관한 한, <조선일보>에는 사실이 아니라 의도와 추정과 악의가 넘친다. <조선일보>는 판결을 존중하지 않는다. 재판부가 배척했는데도 검찰의 주장을 일관되게 보도한다. 정적 제거를 위한 정치적 수사이고 조작 수사라는 합리적 의심이 차고 넘치는데도 윤석열 검찰의 수사는 촘촘했다고 치하한다. 항소 포기는 이재명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것이고 ‘대장동 일당’이 이재명에게 불리한 증언을 못 하게 하려는 입막음용이고, 부장검사가 심야에 피의자를 불러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며 회유를 했고 ‘배를 가르겠다’는 무시무시한 말로 공갈 협박도 했다는 법정 증언은 정권이 바뀌니 갈아탈 준비를 하는 거란다. 기사를 쓰랬더니 소설을 쓴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김건희 특검 수사는 ‘이재명 방탄용’이라는 황당한 주장

조선일보의 김건희 보도는 어떠했던가. 문재인 정권의 검찰이 ‘정예 수사팀’을 구성하여 20개월 동안 탈탈 털었으나 혐의점을 찾지 못해 기소하지 못했는데 디올백 때문에 불이 붙은 것이고, 김건희 여사는 치밀하게 접근한 최재영 목사에게 당한 것이며, 특검으로 재수사해 본들 허탕으로 끝날 게 뻔한데도 민주당은 ‘이재명 방탄용’으로 특검을 하자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보도했었다.

윤석열 검찰이 체면 깎이는 출장 조사에 휴대전화 뺏기는 수모까지 감수하며 ‘보여주기’ 수사를 하고 결국 김건희의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과 ‘아유 뭘 이런 걸 자꾸’ 하며 받은 디올백 수수에 불기소 처분을 내리자 ‘일체의 정치적 고려 없이 증거와 법리에 따라 판단했고 법률가의 직업적 양심에 따라 내린 결론’이라는 검찰의 주장을 중계하듯 보도했었다. AI 기자에게 맡겼어도 기사를 그렇게 썼을까?

같은 대통령인데 박근혜 대하는 태도와 문재인 대하는 태도가 왜 다른 걸까? 김건희에게 적용한 논리는 왜 이재명에겐 적용하지 않는 걸까? 불편부당한 정론직필이라면서 왜 문재인·이재명에게만 혐오 프레임을 씌우는 걸까? 조선일보 기자들은 기사 쓰기 전에 ‘딱딱한 의자’에 앉아 ‘나는 왜 이 기사를 쓰는가’, ‘나는 누구를 위해 이 기사를 쓰는가’ 하는 생각부터 해보기 바란다.

 

전직 대통령 윤석열의 부인 김건희 씨가 12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민중기 특검팀은 김 여사에 대해 자본시장법 위반(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개입 의혹), 정치자금법 위반(명태균 공천개입 의혹),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건진법사·통일교 청탁 의혹)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2025.8.12 [사진공동취재단] 연합뉴스

지면에 팩트는 사라지고 거짓과 억지만 비치는 ‘일그러진 거울’

<조선일보> 지면에는 매일 ‘진실은 팩트에 있습니다. 팩트가 있는 곳에 조선일보가 있습니다.’라는 사고(社告)가 실린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주는 2022년 창간 기념식에서 ‘할 말을 하는’ 저널리즘 정신을 지키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한시도 잊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2024년 신년사에선 오직 사실에 입각하여 진실을 추구하는 ‘팩트 퍼스트(fact first)’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고도 했었고, 올해 신년사에선 ‘언론은 세상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고도 했었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사주의 당부대로 사실을 추구하고 저널리즘 정신을 지키고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을까? 그런데 왜 <조선일보> 기자들은 집단 우울증을 호소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조선일보> 기사는 거꾸로 읽어야 세상이 바로 보일 때가 많다고들 입을 모을까? 진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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