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영남의 죽음과 남북관계의 답답한 현실

KBS 교향악단 방북 공연 때의 실랑이 떠올라

남북대결 상황, 운명 아니라 해소해야 할 사태

2025-11-10     손관수 전 KBS 보도본부장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21년 동안이나 역임하며, 한때 북한의 대외적인 국가원수 역할을 했던 김영남이 지난 11월 3일 사망했다. 1928년생으로 97세의 나이이니 질병으로 인한 사망 원인이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죽음이었을 터이다. 언론들은 김일성부터 시작해 김정일, 김정은으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내내 중용됐던 그의 정치 이력, 충성심, 인간성에 관심을 보이며 그와 북한 체제를 잠시나마 조명했다.

무려 반세기 이상 북한의 고위급 간부로 활동한 그였지만, 김영남이 우리 국민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북한의 고위급대표단을 이끌고 방한했을 때다. 당시 그의 나이가 이미 구순이었는데,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과 함께 한 북측 대표단의 방한은, 남북 관계에는 물론 우리 정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김영남은 KBS의 남북 교류 역사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자취를 남겼다. 특히 2002년 추석을 맞아 KBS가 추진한 남북교향악단 평양 합동공연은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취재 일기로 남아있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평양의 봉화 예술극장에서 합동공연 하루 전에 열린 KBS 교향악단의 단독 연주회를 직접 관람했는데, 이는 “당시 북한이 KBS와의 교류사업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김영남의 참관 과정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큰 사달이 있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하던 필자는 김영남이 직접 온다는 소식에 즉석 인터뷰 욕심을 냈다. 물론 사전에 북측과 어떤 협의가 없었지만, KBS가 사업 주관사여서 북측 인사들이 입장하는 모습은 촬영이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시도한 것이다. 나는 카메라 기자에게는 삼각대 쓰지 말고 그냥 ‘어깨걸이’ 촬영 방식으로 내 뒤에 바짝 붙으라고 요청하고선, 극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김영남 위원장에게 신속하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당시 추석을 앞두고 있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질문은 역시 추석 명절에 관한 것이었다. “상임위원장님. 추석을 맞아 남북이 함께 공연하는 좋은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남측 동포들에게 덕담 한마디 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영남은 카메라까지 들이댄 갑작스런 질문에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환한 얼굴로 “즐거운 추석 명절 맞으시라” 정도의 덕담 한마디를 해줬다. 그때 나는 좀 더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더 듣기 위해 “이렇게 교류가 이어지면 더 좋은 일들이 있지 않겠느냐. 남북 교류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신다면…” 정도의 질문을 재차 던졌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은 성사되지 못했다.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경호원들이 가로막으며 제지하기 시작했고, 김위원장도 웃는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의 답변은 안 하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래도 방송에 쓸 수 있는 한마디는 건졌다”는 뿌듯함에 극장 안에 마련된 KBS팀 사무실로 가 촬영이 잘 됐는지 확인하고자 했는데, 이때부터 상황이 급반전됐다.

우리 취재팀을 담당하던 ‘보장성원’(북측 가이드)들이 거의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오더니 “당장 테이프를 내놓으라”며 다그치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 무슨 일이냐”고 반문하니 “그 테이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당시의 평양 합동공연을 책임지던 KBS의 남북교류협력국 단장이 역시 놀란 얼굴로 뛰어 들어오더니 나에게 다급하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상황 설명을 듣고 난 단장은 단호하게 “촬영한 것 지우라”고 지시했다. “이번 사업 전체가 깨질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부득불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의 인터뷰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북측의 긴박한 사정의 핵심은 “경호가 뚫린 것”에 있었다. KBS의 기습 인터뷰로 국가원수급에 대한 신변경호가 뚫린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를 담당하던 ‘보장성원’들이 상임위원장 경호처에 속된 말로 “작살이 났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북측 ‘보장성원’들에게 약간의 미안함도 느끼면서 인터뷰 장면을 지워나갔다. 나는 그 과정에서 “이것도 나중에는 추억이 되고, 역사가 될 텐데, 사진 하나 뽑을 수 있게 한 프레임 정도 남겨 둘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몇 번 말하니, 북측이 이 요구만은 들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남긴 사진이 바로 아래의 김영남 상임위원장 인터뷰 장면 사진이다. 물론 인터뷰는 방송에 싣지 못했다.

 

2002년 9월 20일 평양 봉화예술극장, KBS 교향악단 공연을 격려 차 보러 온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KBS취재진이 인터뷰하고 있다. 오른쪽 무선마이크 들고 있는 사람이 필자.

기습 인터뷰 소동은 더 이상의 후유증 없이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소동 다음날 열린 KBS 교향악단과 조선국립교향악단의 합동공연은 사상 처음으로 남북이 모두 생방송으로 중계했다. 김영남 상임위원장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등 남측 예술인들과 면담도 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는데, 사진 촬영 중 “내가 가운데 서 있으니 KBS 교향악단 단장이 된 것 같다”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폭소를 자아내는 유머러스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남북 관계는 지금과는 천양지차가 있을 정도로 다른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KBS의 평양 합동공연 교류사업에는 김태식 국회부의장을 단장으로 한 6명의 국회 대표단이 동행했는데, 이들은 북한의 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를 방문해 ‘남북국회회담’을 다시 추진할 것에 합의하기도 했다. 또한 “민족의 혈맥을 잇는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경의선과 동해선을 연결하는 행사가 추석 며칠 전에 개성과 금강산에서 각각 열리기도 하는 등 남북 관계는 그야말로 해빙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이런 해빙 분위기가 남북의 교류사업이 아무런 문제 없이, 사업마다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이뤄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역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된 교류사업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체제와 환경, 사고가 다른 남북의 협력 사업은 하나하나가 가시밭길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KBS는 남북 교향악단 합동공연 이후에도 그 어느 언론사보다 활발한 교류협력 사업을 벌여나갔는데, 어느 순간인가에는, 어디에서인가는 꼭 ‘지뢰밭’이 있었다. 기사의 표현 하나가 파국을 빚을 뻔한 경우도 있었다. 북한은 ‘개혁’이란 말도 유일체제를 거스르는 말로 오인될까 봐 절대 사용하지 않는데, 필자가 2002년 북한의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긍정적인 변화의 분위기를 소개하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라고 표현했더니, 이 표현조차 쓸 수 없다고 난리를 쳤다. 9시 생방송 연결 직전까지 “그러면 우리 방송 못 한다. 안 하겠다”라며 마이크 전원까지 뽑아가며 강하게 반발했더니, 이번엔 사업 자체가 무산되면 감당이 안 될 처지였던지 북측 실무자들이 마지못해 양보한 경우도 있었다.

북한과 각종 협력 사업을 진행했던 여러 단체, 언론사들도 대부분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점은, 그때는 그렇게 싸우기까지 하면서도, 그래도 교류 협력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북측과 교류 협력을 진행하면서 아름다운 추억보다 아프고 힘든 기억들이 더 많은 게 경험적 현실이지만, 그래도 교류 자체가 아예 끊어진 것과는 비교할 바는 아니다. 특히 교류가 끊겼다는 것은, 평화가 위협받고 있다는 심각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엄중하다. 만나서 협력하고, 협력을 위해 싸우는 기간에는 최소한의 평화가 보장된다. 그래서 지속적인 교류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교류 중단의 책임을 어느 일방한테만 지울 수는 없다. 더구나 최근 핵개발을 완성하고, 남한을 적대 국가로 선포하고, 모든 교류 협력 중단을 선언한 북한에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는 헌법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고, 이를 지켜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한이자, 책임이지 않겠는가?

비극적인 민족상잔의 6.25 전쟁을 겪은 이후에도 남북은 때로는 대결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때로는 증오하고 때로는 화해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8년 한국의 대통령을 죽이겠다고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와 무장 게릴라의 잇단 침투에도 남북은 1972년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선언한 ‘7.4 남북 공동성명’을, 역시 한국의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1983년의 ‘아웅산 테러’ 이후 경색 국면 속에서도 남북은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 냈다. 남북의 정상이 함께 한 2000년 ‘6.15 공동선언’, 2007년 ‘10.4 공동선언’, 2018년의 ‘9.19 평양공동선언’은 남북의 평화 의지가 한반도의 안보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높인 역사적 변곡점이었다.

북한의 핵개발과 남북 교류 중단, 적대적 국가선언은 남북 간의 대결과 증오의 수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만큼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 문제는 돌파구를 마련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갈등과 충돌, 화해가 파노라마처럼 이어져 온 그간 남북 관계의 역동적인 과정이 잘 보여주듯, 현재 남북 간의 대결 국면이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수위라 해도, 이는 해소해 나가야 할 현실이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남북 관계 역사의 새로운 분수령을 다시 만들어 낼 책임, 우리 모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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