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위원장은 왜 트럼프 대통령 손을 뿌리쳤나?
앞으로도 북미 대화 시기와 조건은 북한이 선택할 것
경주 APEC 정상회의 기간 동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을 거듭 제안했다. “김 위원장과 잘 지낸다”는 친근한 어조에도 북한의 반응은 냉담했다. 미사일 발사와 침묵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 요구를 사실상 철회하고 대북 제재 완화 의사까지 밝히며 북한의 대화 전제조건을 대부분 수용했으나, 김 위원장은 움직이지 않았다. 싱가포르, 하노이, 판문점에 이은 네 번째 정상회담은 결국 무산됐다.
당장은 우선순위에 있는 러시아와의 관계 고려
김정은 위원장의 거부 뒤에는 복잡한 지정학적 변수가 얽혀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북한은 러시아에 수만 명의 정예 병력을 파병하며 사실상 군사동맹을 구축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미국과의 대화에 응할 경우 북러 관계에 균열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지난 3월 착수한 핵추진 잠수함 개발은 러시아의 기술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도 고려됐을 터이다.
북한은 파병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퇴역 핵잠수함의 원자로·증기터빈·냉각 시스템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핵추진 잠수함의 핵심부품인 원자로 세트를 손에 넣었더라도 러시아 기술 지원 없이는 잠수함 장착·가동이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핵추진 잠수함의 건조 성공은 북한에 있어서 대미 핵억제력의 완성을 의미하며 대미 협상력을 극대화하는 빅 카드가 된다. 따라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러시아 관계 유지는 미국 대화보다 우선순위가 높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화 제의 뒤에 이뤄진 최선희 외무상의 러시아 급파도 트럼프 제의에 대한 푸틴 입장을 타진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8월 트럼프-푸틴 알래스카 회담과 10월 부다페스트 회담 취소 사태를 보며 미러 관계 개선 가능성을 낮게 봤을 것이다. 설령 트럼프와 합의에 도달하더라도 하노이 회담 때처럼 네오콘 강경파에 의해 백지화될 수 있다는 회의적 시각도 작용했음 직하다.
북한의 경제 상황 호전도 북미 대화 시급성 떨어뜨려
흥미로운 것은 푸틴 대통령의 역설적 태도다.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우원식 국회의장을 만난 푸틴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묻고, 김정은 위원장에게 한국의 메시지를 전달할 테니 말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의 유럽화’를 포기한 푸틴은 아시아 동진정책을 모색 중이며, 이를 위해 한반도 안정을 선결과제로 본다. 북미 대화 재개가 한국-러시아 경제협력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한국과 경제 교류 재개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변수도 김정은 위원장의 발목을 잡았다. 경주 APEC에서 예정된 트럼프-시진핑 회담에 앞서 김정은 위원장이 서둘러 트럼프를 만나면 북중 관계에 미묘한 난기류가 생길 소지가 있다. 변덕스러운 트럼프의 성향을 고려할 때, 시진핑-트럼프 회동 결과를 지켜보는 게 전략적으로 현명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이 예정된 상황에서 김정은-트럼프 만남은 시진핑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다.
북한의 최근 경제 호전도 김정은 위원장이 대화를 서두르지 않는 배경이다. 최근 북한을 방문한 인사들은 북한이 식량 자급을 이루고 전반적인 경제 상황이 크게 좋아졌다고 전한다. 중국 및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확대는 과거에 비해 안정된 경제 기반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국내 사정의 변화는 북미 대화는 물론이고 남북대화의 시급성을 떨어뜨린다.
지금 더 급한 건 트럼프 아닌가
CNN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37%로 집권 2기 최저치를 찍었고, 부정 평가는 63%로 취임 후 최고를 기록했다. 응답자 68%가 국가 상황을, 72%가 경제 상황을 좋지 않다고 답했다. 관세 전쟁으로 민생이 피폐해지면서 미국 여론은 트럼프에게 싸늘해지고 있다.
11월 4일 뉴욕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조란 맘다니가 당선됐다.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와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당선됐다. 34세 민주사회주의자이자 인도계 무슬림인 맘다니는 뉴욕 최초 무슬림 시장이자 최연소 시장이 됐다. 임대료 동결, 최저임금 인상, 무상버스·보육 확대 등 획기적 민생 공약으로 승리한 이 사건은 미국 민심의 흐름을 상징한다. 이대로 가면 2026년 가을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은 역대급 패배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빅딜'을 통해 노벨평화상 수상에 주력하는 이유는,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부정적 여론을 반전시킬 만한 다른 카드가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발표 시점(통상 10월 초)을 고려해 그 전에 김정은 위원장과 북미 수교 같은 역사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고, 실제 수상이 발표되면 그 여세를 몰아 불리한 중간선거 판세를 역전시키려는 계산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 북미 수교·대북제재 해제, 한국전쟁 종전선언 및 평화조약 체결이라는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 낸다면 한반도 평화체제는 물론 동북아 질서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과거 북미 대화에 매달리던 김정은 위원장은 이제 여유롭게 러·중과 손잡고 시간을 끌며 핵억제력 완성이라는 전략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반면 트럼프는 지지율 급락과 내년 중간선거 패배 위기 속에서 북한과의 극적 합의 카드가 절실하다.
이재명 대통령은 여전히 남북 관계 ‘피스 메이커’ 역할 해야
북미 대화 재개는 일차적으로 북미 수교라는 트럼프의 ‘마지막 카드’에 달렸다. 그러나 그 카드가 나오기 전까지 북한은 러시아 기술 지원으로 핵잠수함 건조를 가속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안정화하며 경제를 회복할 것이다. 경주 APEC에서의 일방적 구애가 보여주듯이 지금 대화를 간절히 바라는 쪽은 트럼프이지 김정은 위원장이 아니다.
동북아의 지정학적 판도를 뒤바꿀 트럼프-김정은 회동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 미중 관계의 추이, 러시아의 동진 전략, 트럼프의 중간선거 계산 등 복잡한 변수가 얽혀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를 모두 계산하며 최적의 타이밍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6일 국회 예결위에서 내년 3월 김정은-트럼프 회담 성사 가능성에 대해 “합리적 기대”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기대에 불과하며 정확한 타이밍은 미지수다. 분명한 건 북미 대화 조건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미국의 일방적 밀어붙이기 구도가 아니다. 북한이 시기와 조건을 선택하는 새로운 국면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극도로 경색된 상황에서 이재명-트럼프 경주 정상회담을 계기로 시작된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 계획은 남북 군비경쟁을 촉발해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북미 관계 개선의 ‘페이스 메이커’를 넘어 남북 관계의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으로 파탄 난 남북 관계에서 극적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 북미 해빙이 이뤄져도 한반도 평화체제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한미 관세 협상 타결로 최대 난관을 넘긴 이재명 대통령이 남북 관계 개선에 총력을 기울이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