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실천'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

희망을 열어줄 '평민 지식인'의 책무 절실

2025-10-22     백승종 역사학자(전 서강대 교수)

21세기 초반의 인류는 다시 불안한 문명 전환의 길목에 서 있다. 정치의 양극화, 경제적 불평등, 환경 위기, 기술 패권 경쟁, 그리고 민주주의의 후퇴가 맞물리면서 “성장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제 역사가는 과거의 해석에 만족할 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갈등과 전쟁을 넘어 세상을 안전하고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지에 응답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국내외의 상황을 진단하고 우리 사회의 정책과 사회적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과 같은 실천적 과제를 외면하기 어렵겠다.

오늘날 한국은 겉으로 보면 민주주의를 구현한 것으로 보이나 분열과 갈등이 극심하다. 국가 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시민의 정치 성향에 따라 크게 엇갈리며, 중첩된 사회 갈등도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다. 신뢰가 무너지고 대립과 분열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내란을 수습하고 사회 대개혁을 이루는 것이 쉬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의 기술’일 것이다. 정파를 넘어 국민 대화의 장을 만들고, 초·중등 교육부터 성인을 대상으로 한 시민교육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학습할 수 있게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정치가 대결의 기술이라면, 민주주의는 공존의 기술이기 때문에 그 학습은 실로 중요하다.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의 2기 활동 방향을 논의하는 워크샵 세미나가 10월 20일 양주 성요셉 수도원에서 열렸다. 2025. 10.20 사진 김 영 

시선을 넓혀 동아시아의 정세를 살펴보면 그 역시 격변과 혼란의 와중에 있다. 중국은 대내외적 불안과 혼란 속에서도 세력 확장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대만은 중국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어 그야말로 생존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신고립주의로 전환한 미국의 손을 끝까지 붙들고자 애를 쓰는 한편, 인도, 러시아, 유럽과도 다자적 연대를 모색한다.

그렇다면 한국도 이제는 단순한 균형 외교를 넘어 ‘동아시아 평화협력’을 주도해야 할 것이 아닌가. 또, 한·일·대만 간에 기술안보 협의체를 강화해 주요 산업의 공급망을 지키기 위한 공동체를 구축하고, 아울러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재가동해야만 할 것 같다. 사실 한반도의 평화는 당사국의 운명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안정과 직결된 문제라고 봐야 한다.

80년 동안 세계를 지배한 미국은 장기 침체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중산층까지 붕괴해 경제적 절망의 정치화가 진행 중이다. 이른바 ‘트럼프주의’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위기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둘 때 한국은 종래의 대미 의존 외교에서 벗어나, 다자적 외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내적으로는 포용적 성장과 정의로운 전환을 통해 국내에서 극우 포퓰리즘이 확산하는 현상을 방지해야 한다. 요컨대 경제적 정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발전시켜야 하겠다.

오늘날 유럽 사회는 1930년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국가부채가 급증하고 복지 기능이 약해진 가운데 극우 정당이 활개친다. 근년에는 브렉시트와 중동 난민 문제 등을 겪는 가운데 유럽연합이 심하게 분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자 과거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수호자였던 유럽은 불안정의 상징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한국은 과거 유럽에 대해 가졌던 낭만적 시선을 거두고, 냉엄한 현실 인식을 토대로 그들과 민주주의 연대를 결성하는 등 새로운 관계 설정을 해야 한다.

국내외의 사정을 종합해보면 성장과 평화의 시대는 종말을 고한 것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인구 감소, 기후 위기, 불평등의 구조적 심화는 지구적인 현안이다. 이런 가운데 ‘지속적 팽창’이 어떻게 가능할지 의문이다. 아마도 인류는 ‘질서 있는 축소’를 준비해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익숙해 있던 경제성장 중심의 사고를 청산하고, 국민 행복과 생태계의 균형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경제 지표를 마련하면 어떠할까. 요컨대 탈성장 교육과 생애주기 복지정책을 차근차근 추진해야 한다.

역사가로서 필자는 과거의 혼란과 비극적인 역사를 거울삼아 폭력을 줄이고 평화를 설계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거듭 깨닫게 된다. 19세기 말 우리 역사의 등불이 되었던 몇몇 평민지식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최제우·전봉준·최시형 등은 문명사적 혼란과 고통 속에서도 평화를 꿈꾸며 실천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을 우리의 스승으로 삼아 서로 다르되 함께 조화를 이루는 ‘부동이화(不同而和)’의 정신으로 오늘의 위기를 희망으로 바꿔야 한다.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민주주의야말로 평화의 원천이며, 평화 없이는 민주주의도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평화 실천’은 한낱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적 과제다.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평화를 실천하는 것은, 혼란스럽고 분열된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 믿는다. 

● 이 글은 ‘민주사회를 위한 지식인 종교인 네트워크'의, 지난 20일 민사네의 2기 활동 방향을 논의하는 워크샵 세미나(양주 성요셉 수도원)에서 발제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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