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미국의 민주주의 시계

헌법의 경직성과 게리맨더링, 그리고 ‘지도 위의 쿠데타’

2025-10-11     이병권 인문연구가

신화가 된 민주주의, 그러나 시계는 멈췄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리더로서 세계적 권위를 누려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민주주의의 시계는 멈춰섰습니다. 헌법과 선거제도는 200년 전 마차 시대의 틀을 고집하며, 시대 변화 앞에서 스스로를 성역화했습니다. 건국의 주역들은 왕정과 귀족정, 독재의 폭주로부터 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 취지는 ‘민주주의의 지속’이었지만, 그 장치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진화’를 봉쇄하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후대의 정치 세력들이 헌법을 시대에 맞게 개정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점입니다. 결국 헌법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아니라 권력 유지의 방패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헌법 제5조(Article V)는 개정을 위해 의회의 3분의 2와 50개 연방 주의회 4분의 3, 즉 38개 주의 동의를 요구합니다.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입니다. 그 결과 헌법은 지난 200여 년간 단 한 번도 근본적 개정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시대의 변화는 헌법 밖에서 일어났고, 헌법은 변화에 눈을 감은 채 경직된 껍데기로 남았습니다. 이러한 헌법 해석권을 독점한 연방대법원은 스스로를 ‘헌법의 해석자’로 신격화하며, 선거법 개정 등 정치 개혁을 ‘헌법 위반’이라는 이름으로 무력화시켰습니다. 헌법의 경직성과 사법의 성역화가 결합되면서 미국 민주주의는 스스로의 개혁 가능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게리맨더링 - 제도적 틈을 이용한 정치공학

이 경직된 헌정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를 왜곡한 대표적 제도가 바로 게리맨더링(Gerrymandering)입니다. 1812년 매사추세츠의 주지사 엘브리지 게리(Elbridge Gerry, 1744–1814)는 자신이 속한 민주공화당(현 미국 민주당의 전신, Democratic-Republican Party)의 승리를 위해 선거구를 자의적으로 조정했습니다. 새로 그려진 선거구의 지도가 도롱뇽(salamander)을 닮았다고 하여, 그의 이름 ‘게리(Gerry)’와 ‘맨더링(mandering)’이 결합된 단어가 탄생했습니다. 그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다음 해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재임 1809–1817)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후 이러한 선거구 획정(조작) 방식은 ‘합법적 부정선거’의 전형으로 미국 정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 제도적 왜곡의 결과, 동일한 득표율이라도 의석 수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사례를 보면, 2016년 위스콘신 주의회 선거에서 민주당은 53%의 득표율로 36%의 의석만 확보한 반면, 공화당은 47%의 득표로 63%의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법적 테두리 안의 ‘합법적 불평등’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이러한 게리맨더링이 구조화된 근본 원인은 이를 제지해야 할 법원이 방관하거나, 심지어는 합리화했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선거구 재획정이 10년마다 주 의회에서 이루어지며, 연방대법원 판사는 종신직입니다. 한국처럼 헌법기구로서 선거관리위원회가 존재하지 않으며, 대법관 임기 제한도 없습니다. 이 제도적 경직성이 정치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토양이 된 것입니다.

 

2025년 10월 9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근교 브로드뷰에 있는 불법이민자 구금시설 근처에서 군대 투입을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열리고 있다. (Photo by SCOTT OLSON / GETTY IMAGES NORTH AMERICA / Getty Images via AFP) 2025.10.10. 연합뉴스

개혁의 시도, 사법부의 방관, 그리고 일부 성과

미국에서 이러한 민의의 왜곡과 표의 등가성이 무시되는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부 주에서는 게리맨더링 개혁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실험이 있었습니다.

애리조나주(2000년, Proposition 106): 주민 발의를 통해 독립선거구획정위원회를 설치했고,

캘리포니아주(2008·2010년, Proposition 11·20): 입법부의 권한을 시민위원회로 이관했습니다.

미시간주(2018년, Proposal 2): 주 헌법 개정을 통해 무작위 시민위원회를 도입했고,

미주리주(2018년, Clean Missouri Initiative): 투명성과 공청회 절차를 강화했습니다.

이 가운데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는 비교적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대다수 개혁은 정치권 개입과 법원의 소극적 태도로 무력화되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선거구의 왜곡 여부를 판단할 헌법적 기준이 없다”며 개입을 회피해 왔습니다. 결국 〈루초 대 커먼 코즈(Rucho v. Common Cause, 588 U.S. [2019])〉 판결에서 대법원은 게리맨더링을 ‘정치적 사안(political question)’으로 규정하며 사법심사 대상에서 배제했습니다.

이후 대법원은 2020년 이후 보수 우위(6대 3 체제)로 재편되며, 공화당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게리맨더링의 문제에 더욱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 문제에 대한 불개입 원칙을 반복했습니다.

미국 헌법센터(The National Constitution Center)는 2022년 1월 25일자 칼럼 〈자신만만하고 공세적인 보수 세력(The Confident and Aggressive Conservative Majority)〉에서 “보수파가 다수인 대법원은 이제 스스로를 헌법의 중립적 수호자가 아니라, 적극적 정책 결정 주체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헌법센터는 이어 “최근 판결들이 민주적 합의나 입법의 영역으로 남겨야 할 사안에까지 사법부가 개입함으로써, 대법원이 헌법적 균형자에서 정치적 중재자로 변모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출처: The National Constitution Center Blog, 2022.1.25)

한편 브레넌 센터(Brennan Center for Justice, NYU School of Law)는 2019년 보고서 〈극단적인 선거구 지도(Extreme Maps)〉와 2024년 보고서 〈게리맨더링이 2024년 미국 하원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How Gerrymandering Tilts the 2024 Race for the House)〉에서, 게리맨더링으로 인해 공화당이 전국적으로 약 16~17석의 구조적 우위를 확보했다고 분석했습니다.

브레넌센터의 보고서 Extreme Maps(2019) 및 How Gerrymandering Tilts the 2024 Race for the House(2024)를 근거로 정리한 것임.

2025년 현재 미국 하원은 총 435석 중 공화당 221석, 민주당 214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근소한 격차는 단순한 선거 전략이 아니라 제도적 편향의 산물입니다. 전국 득표율이 동일하더라도 공화당이 평균 16~17석의 ‘내장된 의석 보너스’를 확보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공화당의 게리맨더링에서 시작한 ‘레드맵(REDMAP: 지도상에서 공화당을 의미하는 붉은색이 차지하는 정도를 뜻하는 표현이자 공화당의 선거 전략)’은 단순한 지역 전략이 아니라 지도 위의 권력 구조 재편이자 정치공학적 성공 사례가 되었습니다.

레드맵(REDMAP) ― “지도를 바꾸면, 패배해도 이길 수 있다”

2008년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II, 1961~)의 당선으로 정권을 잃은 공화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면, 패배해도 이길 수 있다.”

이 문구는 2010년 공화당 전국위원회 산하 공화당 주의회지도부위원회(RSLC)가 중간선거를 앞두고 내세운 전략의 요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레드맵(REDMAP)의 설계자는 크리스 얀코우스키(Chris Jankowski, 1968~), 데이터 설계는 토머스 호펠러(Thomas Hofeller, 1945–2018)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인구조사와 SNS 데이터를 결합해 방대한 유권자 지도를 정밀 분석하고, 민주당 유권자를 ‘패킹(packing)’과 ‘크래킹(cracking)’ 방식으로 재배치함으로써 표를 바꾸지 않고 의석을 바꾸는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여기서 ‘패킹(packing)’이란 특정 정당(주로 민주당) 지지 유권자들을 한 선거구에 과도하게 몰아넣어 그 표를 ‘낭비표(wasted votes)’로 만드는 전략이며, ‘크래킹(cracking)’은 반대로 상대 정당 유권자들을 여러 선거구로 인위적으로 분산시켜 세력을 희석시키는 방식입니다. 이 두 가지 조작 기술의 결합으로 공화당은 실제 득표율보다 훨씬 많은 의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전략은 완벽히 성공했습니다(앞의 표 참고). 2010년 이전 공화당이 장악한 주는 24개였지만, 2012년에는 31개로 늘었고 2020년에도 약 60%의 주에서 재획정 권한을 유지했습니다. 브레넌 센터 분석에 따르면 공화당은 레드맵 덕분에 2012~2020년 동안 하원에서 평균 15~18석의 추가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는 국민의 표가 아니라 지도 위에서 벌어진 쿠데타였습니다.

MAGA와 REDMAP ― “지도 위에서 자라난 트럼프주의”

게리맨더링은 중도파를 몰락시키고 극단주의를 재생산했습니다. 경선만 통과하면 당선이 보장되는 ‘안전구역(safe district)’이 생겼고, 공화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세력의 지지를 등에 업고 그 경선을 장악한 것은 극우 성향의 열성 지지층이었습니다. 한국의 대구·경북 지역에서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등식과 유사한 형국이 미국 정치에 고착화된 것입니다.

이 구조 속에서 트럼프주의(MAGA)는 단순한 정치운동이 아니라 제도적 기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결과 2020년 이후 공화당 하원의 약 40%가 MAGA 성향 의원으로 채워졌습니다. 게리맨더링은 사회의 균열을 제도화했고, 소수자·도시·진보 시민의 표는 무력화되었습니다. 이는 MAGA의 구호 ― “진짜 미국 대 그 나머지(Real America vs. the Others)” ― 를 정치구조로 고착시킨 셈입니다.

미국 사법부의 신성화와 한국 사법부의 교조주의

미국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Louis D. Brandeis, 1856–1941)는 “법에 대한 존중을 원한다면, 먼저 법이 존중받을 만해야 한다(If we desire respect for the law, we must first make the law respectable.)”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의 저서 《남의 돈 - 그리고 은행가들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Other People’s Money and How the Bankers Use It, 1914) 서문에 등장하는 문장입니다. 브랜다이스는 이 책에서 ‘금융 신탁(Financial Trust)’과 월가의 독점 구조, 그리고 은행과 산업자본의 결탁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비판했습니다. 또한 법이 도덕성과 정당성을 잃으면 국민의 신뢰 또한 무너진다고 경고했습니다. 훗날 그는 미국 연방대법관이 되어 공익 중심의 법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연방대법원은 오히려 그 정신과 반대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법복 귀족주의(Judicial Aristocracy)’로 변질되었습니다. 이 교조적 태도는 한국 사법부에도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한국의 조희대 대법원은 ‘삼권분립’을 헌법의 신성불가침한 절대 조항처럼 오독하며, 국회의 사법개혁 입법, 대법관 증원, 대법원장 국회 출석 요구 등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 헌법 어디에도 ‘삼권분립’이라는 문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력의 상호 견제만이 강조되어 있을 뿐입니다.

한국 사법부는 미국식 사법엘리트주의를 수입하면서 ‘사법권의 독립’을 ‘사법권의 성역화’로 곡해한 구조적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조희대의 사법부가 내란 재판에 소극적인 것도, 지귀연 판사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윤석열을 석방한 것도, 이재명 대통령 후보를 상고심에서 파기환송한 것도, 내란 재판의 비공개를 고수하는 것도 모두 스스로의 보수성(내란동조성)을 증명하는 사례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미국 사법부와 한국 사법부의 차이를 찾는다면, 미국 사법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방군을 투입하려 한 명령을 법적으로 기각하며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고 있는 반면, 한국의 조희대 사법부는 극우 집회조차 모순된 판결로 허용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기는커녕, 사법개혁의 명분만 쌓는 극단적 ‘자기분열’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법부가 스스로 자신의 권위와 독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특정 정치세력의 대변인으로 자처할 때, 국민과 시민이 선택할 길은 명료합니다. 이제 개혁의 시간표와 내용, 그리고 강도만이 남았습니다.

한국 민주공화정의 방파제- 혐오와 극단주의를 제어하는 제도 설계

오늘날 민주공화정의 위기는 단지 정치제도나 검찰을 비롯한 사법제도의 개혁만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더 근본적인 위협은 극우·혐오·반공 포퓰리즘의 결합이 시민사회를 잠식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의 MAGA가 게리맨더링의 제도적 보호막 속에서 자라났듯, 한국에서도 사법·검찰·언론의 권력 네트워크가 ‘법의 이름으로 정치’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지도 위의 민주주의’가 ‘제도 위의 독재’로 변질될지도 모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민주공화정의 가치를 곧추세워야 합니다.

첫째, 극단적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세력에 대한 법적 대응체계를 구축하고,

둘째, 민주헌정을 위협하는 선동과 허위정보를 감시·제재할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야 합니다.

이미 논의되어 온 ‘혐오방지법’과 ‘차별금지법’ 제정은 단순한 인권 입법이 아니라, 헌정질서를 방어하기 위한 법적 방파제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독일의 연방헌법수호청(BfV, Bundesamt für Verfassungsschutz)처럼 헌법 파괴 행위를 감시·조사하는 ‘한국형 헌법수호청(가칭)’ 설립이 검토되어야 합니다.

이 기관은 특정 정파가 아니라, 시민이 주체가 되고 국회가 감시하며 정부가 집행을 보조하는 삼자 견제 구조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극단주의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혐오와 차별, 반헌법적 정치 행위를 감시하는 국가적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시민이 매일 새로 써 내려가는 사회적 계약입니다. 법은 인간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시대정신과 시민의 뜻에 맞게 갱신될 때 공화국은 살아 숨 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약속을 다시 써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펜은 시민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 참고문헌 >

Brennan Center for Justice.(2019). Extreme Maps: How Gerrymandering Rigged American Democracy.New York University School of Law.

Retrieved from: https://www.brennancenter.org/our-work/research-reports/extreme-maps

Brennan Center for Justice.(2024). How Gerrymandering Tilts the 2024 Race for the House.New York University School of Law.

Retrieved from: https://www.brennancenter.org/our-work/research-reports/how-gerrymandering-tilts-2024-race-house

Rucho v. Common Cause, 588 U.S. ___ (2019).

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Full text: https://supreme.justia.com/cases/federal/us/588/

The National Constitution Center.(2022, January 25). The Confident and Aggressive Conservative Majority.

Retrieved from: https://constitutioncenter.org/news-debate/blog/the-confident-and-aggressive-conservative-majority

Brandeis, Louis D.(1914). Other People’s Money and How the Bankers Use It.New York: Frederick A. Stokes Company.

(Reprinted by Bedford/St. Martin’s, 1995.)

Bowler, Shaun.(2025, March 17). “Gerrymandering and Political Distrust.” UCR News,University of California, Riverside.

Retrieved from: https://news.ucr.edu

U.S. Constitution.(1787). Article V.National Archives.

Retrieved from: https://www.archives.gov/founding-docs/constitution-transcript

Jankowski, Chris.(Interview, 2012). “How REDMAP Won the Map.”The Economist,December 2012 issue.

(Referenced regarding REDMAP strategic design, Republican State Leadership Committ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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