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검찰개혁만큼 시급하다
통일교, 일부 목사의 탈선만으로 볼 수 없는 사태
사회의 치유자가 아닌 치유 대상이 되고 있는 종교
통일교 한학자 총재의 구속 사태는 종교의 불순한 정치 개입을 단면적으로 보여준다. 정교분리 원칙의 헌법에 반하는 반헌법적 행위는 많은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지만 더 큰 놀라움은 따로 있었다. 한학자 씨는 자신을 ‘독생녀(獨生女)’라고 주장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남매로 자처했다. 이는 남편이며 창시자였던 문선명을 재림주로 숭배한 것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그것이 충격적인 이유는 이 같은 주장이 적잖은 이들로부터 열렬한 믿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탄핵반대 집회를 주도했던 개신교 목사의 구속 등을 놓고 권력에 의한 ‘종교 탄압’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돌아봐야 할 점은 이런 일들을 통일교라는 매우 특이한 종교에서 벌어지는 예외적 일로,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일부 목사의 일탈로만 볼 수 있을까, 라는 것이다. 교주에 대한 신격화로써 ‘정통’ 기독교로부터 이단적 행태로 배척받는 '일부 종교'와 극우적인 '일부 종교인'의, 예외이며 탈선만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다른 하나의 장면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건설업자와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이 윤석열 전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씨에게 보석 목걸이와 금거북이를 건넸다는 게 알려져 실소를 자아냈는데, 이들이 어울린 곳이 ‘국가 조찬 기도회’였다고 하는 게 주목된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처음 시작된 이 조찬기도회에서는 “하나님이 (군사) 혁명을 성공시켰다”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와 같은 말들이 오가고, 80년 학살자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칭송하는 기도가 행해졌는데, 이번에는 ‘매관매직’에 연루됐다.
'연루'됐다고 하는 건 지나친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자라다. 종교야말로 한편으로 가장 세속적인 모습, 가장 타락한 모습으로 우리 사회의 여러 그늘과 부조리에 연루됐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배후로서, 토대로서, 발원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거룩한 것’의 타락은 가장 추악한 법이다. 지금 한국 종교가 사회의 여러 영역들과 맺고 있는 ‘신성 동맹’에서는 신성성을 찾아볼 수 없다. 종교는 다른 세속의 것들을 천상으로 이끌어 올려주기보다 오히려 세속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종교의 모습은 상당 부분 통일교 사태를 단지 일부의 문제, 사이비나 이단적인 종파에서 벌어지는 일로만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종교 탄압'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종교가 오히려 한국 사회의 발전과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양상이다. 종교는 치유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치유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몇 년 전 <나는 신이다>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사이비 종교의 기이한 행태가 많은 충격을 안겼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 비난하며 규탄하는 것과 함께 거대 교회들의 교리나 행태는 과연 근원적으로 그와 다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이비는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 도심의 화려한 건물들 안에서 다른 형태로 펼쳐지고 있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가로와 세로의 축이 하나는 사랑을, 다른 하나는 정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본다. 이는 다른 모든 종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는 이성과 영성의 조합이라야 한다. 종교는 세속의 초월이지 단절이 아니듯이 이성의 배제가 아닌 이성의 초월이다. 그러나 한국 종교의 역설은 오히려 가장 세속적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추구하는 영성이 이성의 기반이 없는 영성이라는 것, 맹목이라는 것에 있다.
신앙의 절대성, 믿음의 신비에 대해 "나는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는 말로 자주 설명된다. 이 말은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나온 것으로 오해되는 데다가 본래 의미와도 달리 변질돼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이 상호 보완적이라고 보았으며, 이성의 포기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불합리하기에 믿는다’라는 말의 본래의 의미도 사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의 죽음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설적 사건임을 강조하려던 것이었다. 그것은 이성의 포기가 아니라 이성의 추구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이성의 배제가 아니라 이성의 초월을 얘기하려 한 것이었다. 오래 전 교부의 철학까지 애써 빌려올 것도 없다. 무릇 큰 가르침으로서의 종교(宗敎)는 결코 이성의 바탕 위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적이며 자명한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많은 종교 현장에서는 이성의 바탕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 복창되고 있다. ‘불합리하기에’를 넘어 ‘불합리해야 한다’는 당위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20세기의 탁월한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했듯이 ‘의심을 통한 믿음’에 있다. 이성을 거치지 않은 맹목적인 신앙은 예수가 갈릴래아의 민중들을 깨치려 했던 거짓 믿음, 거짓 신앙이었을 것이다. 예수는 “나 예수를 믿지 말고, 대신 너 자신 안의 빛을 찾으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너는 나보다 더 큰 이가 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이었다고 (그래야 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 즉 큰 가르침으로서의 종교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웅장한 건물에서 엄숙한 예배를 드린다 한들, 그곳이 또 다른 ‘아가동산’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에 대한 또 다른 오해 중의 하나로 흔히 얘기되는 말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다. 이는 그 말의 발화자의 '불온한' 사상과 결부돼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인간의 삶의 진보를 위해 전력을 다해 싸운 불굴의 투사였던 150년 전의 그의 이 말은 종교를 단순히 '악'으로 치부하지 않고, 종교가 왜 생겨났는지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함께 얘기한 것이었다. 그가 말했듯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지만, 그래서 또한 인민의 아편’이 돼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치유를 제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마취제와 같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이중성. 그것이 어떤 사회에서건 절실히 요청되는 면과 함께 위험성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종교에 좋은 종교가 있고 나쁜 종교가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우수한 종교도 열등한 종교도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교를 믿고 드러내는 행태에는 선과 악, 우월함과 열등함이 있다. 이 같은 평가는 특히 한국의 개신교의 행태에 대한 것이다. 지금 한국의 많은 종교 문제는 사실 '여러 종교들'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신교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러니 '개신교 문제'라고 해야 더욱 적확하고 공정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전 세계 대형교회 순위에서 1위인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비롯해 10대 교회 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외형적으로는 대단한 '역사'를 일궈냈다. 한국 종교의 문제는 특히 개신교에서 두드러진다. 1000만 명이 넘는 신도수를 자랑하며 세계 종교사에 유례 없는 성장을 이뤘지만, 그 이면에는 배금(拜金)과 배권(拜權)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대형 교회의 신도수가 늘어날수록, 건물이 커질수록 이들은 존경과 경건함 대신에 비판과 근심을 사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이 믿는 것은 신(God)이 아닌 물신(Gold)이라는 비판이 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 했던 성경 말씀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일까. 예수의 이름으로 반예수, 종교의 이름으로 반종교적인 이들에 대해 예수는 뭐라고 할 것인가.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 스승을 3번 부인했듯이 혹 예수가 지금 한국에 찾아온다면 "이런 교회를 나는 결코 알지 못한다"고 거듭 부인하지 않을까.
한국의 (실질적) 민주화, 상식화를 위해서는 종교의 참종교화, 종교의 상식화가 필요하다. 그 과제는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이며, 무엇이 진짜이며 무엇이 사이비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한국 개신교계는 1947년 기독교의 지성인 김재준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해 추방한 전력이 있다. 나는 '이단'이란 용어 자체의 위험성을 잘 알지만 한국 (일부) 개신교의 참종교화를 위해서는 상식의 관점에 입각한 제대로 된 이단논쟁이라도 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단 논쟁에서 통일교나 아가동산 같은 곳만이 이단인 것인지도,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마르크스가 얘기했듯 어떤 사회에건 종교는 불가피하다. 오히려 반드시 필요하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절대적인 필수물로서 종교는 요청된다. 그러니, 우리에겐 종교가 필요하다. 단 '진짜 종교', 좀 더 종교다운 종교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지금, 검찰개혁만큼 필요한 것은 종교개혁인 이유가 이런 사정들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