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는 해외 입양인의 아픔
[시민활동가를 만나다] 몽테뉴해외입양연대 배진시
프랑스에서 귀국 후 한인입양인 통번역 지원 시작
해외입양인 뿌리찾기 쉼터 자비운영하며 시민활동
한국가족 찾은 이후 조울증 치료된 비르지니 사례
아동정보가 사라진 입양인 다수, 부모찾기 1% 미만
해외입양중단, 고아원폐지, 원가정지원 강화해야
몽테뉴는 16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철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학자라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얻은 사소한 경험에도 모든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 사유의 바탕으로, 그는 일반적인 모습에서 벗어난 인간의 이상행동이 정신질환이거나 트라우마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말한 최초의 학자였다. 주술과 미신적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중세 유럽과 프랑스에서 이러한 몽테뉴의 가설이 인간을 이해하는 단초의 시작이 되었다. 자신이 만든 모든 단체나 장소에 몽테뉴라는 이름을 넣어 활동하는 활동가가 있다. 그가 바로 '몽테뉴해외입양연대'의 배진시 대표이다. 그는 프랑스와 벨기에 등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는 해외입양인들을 돕고 있다.
배진시 대표와 필자는 입양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며 만났다. 필자가 생후 80일 된 둘째 아들을 입양한 후, 2009년부터 공개입양 가족 단체인 한국입양홍보회 인천대표와 운영위원을 맡아 관련운동에 참여하던 중이었다. 말하자면, 직장생활을 하며 시민운동을 병행하고 있었던 참이다. 한편 배진시 대표는 그 무렵 프랑스 유학 뒤 귀국하여 프랑스 입양 한인들을 위한 통번역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유학중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던 시절 만났던 한인입양인과의 인연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관련 활동을 이어나갔다. 나와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 어쩌면 한두 번쯤은 마주쳤을 법도 하지만 서로가 인사를 나눌 기회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와 내가 만난 건 단 두 차례, 최근 들어서였다.
하지만 만남의 횟수로 의식이나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유튜브 채널 <몽샘책방>의 운영자로서 나의 신작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작가 인터뷰를 위해 처음 만났고, 시민언론 민들레에 이 기사를 쓰기 위한 인터뷰로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한번은 서울시청 인근에서, 또 한 번은 불광동이었다. 그러나 첫 만남부터 그리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그와 내가 고민하고 활동하는 지점의 교집합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아원 출신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단톡방에 함께 머물며 그들의 아픔을 지원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던 터였다. 그를 불광동에서 만났던 이유는 그가 운영하는 해외입양인 쉼터 겸 몽테뉴 도서관이 불광동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외입양인들이 자신의 부모찾기(뿌리찾기)를 위해 한국을 방문할 경우 모든 경비를 자비로 해결해야 하는데, 그들에겐 숙박비가 가장 큰 부담이다. 이 부분을 지원하기 위해 그는 불광동에 해외입양인들을 위한 숙소를 자비로 운영하고 있다.
1973년생 비르지니 씨가 프랑스로 입양 보내진 것은 5세 무렵이었다. 혼전 임신으로 아이를 낳은 그녀의 생부는 군 입대를 해야만 했다. 잠시 생모가 돌보았지만 미혼모의 몸으로 키우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생부의 집에 맡겨진 후로는 아버지의 여자형제들이 그녀를 돌봤다. 그러나 생부의 장래를 걱정했던 가족들은 그녀를 프랑스로 입양 보내고 말았다. 당시엔 대개의 서양인들이 그러하듯 그녀의 양모 또한 동양과 동양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내가 너를 입양해서 가난한 나라에서 구해줬으니 고마워해라” 그녀의 양모가 비르지니 씨에게 한 말이었다. 이에 질세라 그녀도 “내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당신의 딸이 되어주었으니 당신이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는 말로 응수했다. 이 대화는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물론 그 가정에 입양된 다른 동생에 비해 무뚝뚝한 비르지니 씨와는 성격상 큰 차이를 보인 것이 한 이유이기도 했다. 양부모는 애교 많은 동생에게 더 많은 사랑을 베풀었다.
비르지니 씨가 배진시 대표에게 연락을 취해온 것은 2025년 5월경이었다. 이미 한국에서 생모를 만난 후 생부를 찾는데 도와달라는 요청이 온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생부의 옛 가족사진을 찾아냈고 친척을 통해 충청도에서 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생부는 이미 재혼을 한 상태였고 생부의 배우자가 그들의 만남을 거부했다. 겨우 설득 끝에, 지나가는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고 감사의 사진 한 장 남긴 척하며 생부와의 소중한 재회에 성공했다. 그러나 재회현장에서는 그 흔한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만남을 허락하는 대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생부 배우자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작은 사진 한 장만 부둥켜안은 채 헤어졌지만 이후 비르지니 씨를 그토록 괴롭혔던 조울증이 치료된 기적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 의사로 일하는 어느 입양인은 한국에서 생부모를 만나 10여 년간 만남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연락을 끊기도 했다. 그 입양인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입양보낸 한국의 부모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며,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입양인, 특히 해외입양인이 갖고 있는 상처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특히 입양부모와의 애착관계가 작을수록 한국을 향한 복수심이나 증오심은 더욱 단단하며, 한국에서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더욱 집착하기도 한다. 다만, 실제로 찾을 수 있는 경우는 전체 신청자의 1% 남짓에 불과하다.
처음 배진시 대표는 별도의 단체를 만들지 않고 기존 단체의 활동 지원을 생각하며 이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단체 운영자들은 그를 불편해했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한 (해외)입양인 지원활동이 나중엔 후원금을 받기 위한 보여주기식 사업으로 전락해 있다는 진실과 마주했고 기존 단체들과의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활동을 이어나간 것이다. 예를 들어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하며 후원금을 받기 위해 사업을 부풀리거나 동일한 사업을 변조하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끼며 그는 임의단체로만 운영하며 순전히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비용으로 단체를 꾸려간다. 초심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채택한 방식이었다. 몽테뉴해외입양연대는 후원금을 일체 받지 않으며 참여하는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봉사에 임한다. 부모를 찾는 프랑스 입양인들의 통번역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부모를 찾고자 하는 해외입양인들을 직접 지원하기도 한다.
유럽의 문화와 사고방식 그리고 한국의 문화와 사고방식은 확연히 다르다. 해외입양인들이 한국에서 부모 친척을 찾아서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정체성에서 시작된다. 나는 누구인지, 왜 입양을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당시 부모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등을 알아가면서 자신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탐험이자 자기치유이며 그런 방식으로 정신적 상처를 해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를 대하는 한국의 문화는 많이 다르다.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부모 친척들은 자신의 삶이 현실적으로 침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과거도 부정하며 만남을 거부한다. 유전자 검사를 위한 소송 직전에서야 인정하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어느 공공기관장은 면전까지 찾아온 자신의 딸을 부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녀를 입양 보냈던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싶어 한다. 그나마 서류가 남아 있는 경우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 입양아동의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아동권리보장원에 입양서류의 흔적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한편, 서류가 존재해도 개인정보보호라는 이유로 입양인들의 뿌리 찾기에 대단히 비협조적이다.
80년대 후반까지 이른바 3저(低) 시대로 경제는 호황이었으며, 산아제한 정책으로 출생자 수는 감소하고 있었지만 해외입양은 더욱 늘었다. 1971년 신생아 수는 102만 여명이었으나 그해 해외입양은 2천 명대였던 반면, 1985년 65만여 명인 신생아에 비해 해외입양은 8837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는 당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해외입양에 드라이브를 걸었던 정책도 크게 작용했다. 경기장과 도로 그리고 선수촌 등 편의시설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한 궁여지책과 함께 해외 입양은 ‘아동 수출’로 여겨지며 본격적으로 산업화된 것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 남한은 북한으로부터 ‘아기를 팔아 돈을 번다’는 비판을 계속 받았다. 이에 정부는 해외 입양 쿼터제를 도입해서 단계별로 해외 입양을 줄여나가고 1985년에는 전면 금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1980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며 이 계획은 폐기되고 오히려 해외입양을 적극 장려하여 정부와 입양기관 모두 '아동수출' 활성화에 혈안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아동을 대량으로 ‘수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 범죄적 수법도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탁아동으로 고아원 입소한 아동들을 부모 없는 고아로 만들어 입양 보내는 등 서류를 조직적으로 위조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소아성애자들에게도 아이를 입양 보냈고, 입양된 아동들 중에는 국내에서 납치된 아동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죽은 아동의 신분으로 바꿔치기를 한 경우도 존재했으니 이는 경찰, 정부기관이 입양기관의 위조문서에 도장을 찍고 승인하는 등 협조 내지는 방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입양기관은 공식적으로 비영리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기부금의 형태로 해외에서 수백만 달러를 받아내며 승승장구 했다.
1990년대 까지 우리나라에서 해외입양을 가장 많이 보낸 나라는 미국이며 다음으로 프랑스를 꼽는다. 프랑스는 기본적인 의식주와 교육문제가 정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복지국가이다. 사교육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가정에서 지출되는 일상생활비가 그곳에서는 큰 돈 들이지 않고 해결된다.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나라이다. 또한 그들은 기독교적인 사상이 정신세계에 체득되어 있다. 가난한 나라의 아동을 입양하는 일을 ‘시혜’를 넘어 ‘구원’으로까지 생각하는 일종의 선민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런 바탕 위에 입양이라는 일이 이루어진다. 입양부모의 입장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위한 베풂의 방식을 생각한다. 그러나 해외입양인의 관점에서 입양은 또 다른 생존의 영역이다. 프랑스에서 동양인은 동물원 원숭이 취급 받는 게 일상이다. 입양 초기부터 얼굴색 다른 이방인이 프랑스어를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는 지역의 구경거리가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입양인들의 트라우마는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해외입양들의 자살률은 현지인의 3 ~ 4배에 달하며 약물중독이나 정신질환에 시달리기도 한다.
저출생을 걱정하는 대한민국은 지난해에도 해외로 입양된 한국인이 58명이나 된다며, 배진시 대표는 "지금이라도 해외입양을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서양에는 존재하지 않는 고아 수용시설도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아원에 지원할 돈으로 원가정 보호에 힘쓴다면 미혼모에 대한 편견도, 시설에서 고통 받는 고아아닌 고아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숭실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조소연 교수는, “아동 1인당 고아시설에 지원되는 비용은 연간 3600만원 정도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는 기초생활비와 시설유지비 인건비 등을 합한 금액으로 여기에 각종 추가비용 이를테면, 아동의 심리치료비, 교육비 등을 더하면 그 금액은 연간 5천만 원을 상회한다. 위탁가정의 경우 연간 1천만 원 내외로 지원되고 있으며 원가정(미혼모 가정 등)보호에는 연간 250만 원 정도만이 지원되고 있는 실정이다”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이는 정부가 오히려 고아산업을 육성 지원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국가가 직접 지원하면 복지라고 할 수 있지만 고아원 운영처럼 민간에 위탁된 복지는 결국 산업화 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한계가 아동복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문화강국이며 K-민주주의의 상징인 대한민국에 어울리지 않는 암울한 아동복지의 현주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