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때
12.3 밤 여의도를 찾아온 것은 5.18시민군
계엄군이 답함으로써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해
파시스트 윤 몰락하고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궤도를 벗어난 시간을 제자리로 되돌릴 때
한강 작가는 지난 해 12월 8일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날은 극우 파시스트 내란 수괴 윤석열이 12·3 불법계엄을 선포한 직후로 우리나라 전체가 극심한 혼돈 상태에 빠져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강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시민을 향해 작가 자신이 소설을 쓰며 오랫동안 품어왔던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계엄정국에 던진 이 묵직한 질문에 그 누구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윤석열 탄핵 찬성에 앞장섰던 우리나라 시민세력은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며 한강 작가의 질문에 화답했다.
역사의 반복과 차이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0월 26일 계엄을 선포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한 차례 더 계엄을 기획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전두환이 계엄을 선포한 역사는 박정희가 집권하는 동안 유신헌법으로 자신의 권력이 위협당할 때마다 애용했던 계엄령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두 사람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하고 계엄령으로 권력을 확대 강화했기 때문에 그들이 일으킨 쿠데타와 계엄선포는 친위 쿠데타이자 내란이었다.
민주당 이철희 국회의원은 2018년 보도자료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이 한창이던 당시 2017년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비상계엄에 관한 문건을 공개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면서 기획되었던 비상계엄은 실행될 수 없었고 문건으로만 남게 되었다.
윤석열은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경 법률에 규정된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전혀 아닌 평범한 일상적인 상황이었지만 긴급 대국민 담화 발표를 통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윤석열의 계엄선포 역시 친위 쿠데타이자 내란의 시도였다. 1979년 전두환이 계엄을 선포한 이후 45년 만에 윤석열이 그 뒤를 따르며 계엄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11시 27분 경 발표된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 근거하면 12·3 계엄은 독재자 전두환이 일으킨 계엄령을 모방한 것으로 시뮬라크르였다. 그러므로 윤석열의 계엄선포는 독재자 전두환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5·18 광주와 12·3 여의도의 밤
12·3 계엄이 선포된 직후 5·18 광주에서처럼 여의도에 계엄군이 출동했다. 그날 밤 출동했던 계엄군과 경찰 규모는 총 4,700여명이었다고 나중에 밝혀졌다. 여의도와 각 국가기관에 계엄군이 출동한 것 역시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월 광주의 데자뷰였다. 역사적으로12·3 계엄은 전두환을 완벽하게 모방한 군사정권의 재림을 시도한 것이었다.
"오전 10시께 젊은 학생이 교대 쪽으로 오자 공수부대원 3명이 그를 잡기 위해 쫓아갔다. 도망가던 학생이 멈춰 서자 그들은 다짜고짜 진압봉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쓰러진 학생의 어깻죽지를 내리친 뒤 학생을 인근 공터로 끌고 가더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머리판 등으로 구타한 다음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나무위키, 전계량 씨 증언)
반복되는 이 역사적 사건에서 한 가지 중대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했다면 12월 3일 밤 여의도에 모인 시민들은 목숨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은 철저하게 신군부 독재자 전두환의 살인병기로 전락했다. 계엄군은 전두환이 불법적으로 탈취한 계엄사령부라는 국가기구로부터 승인 받았으나 도덕적·윤리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국가폭력을 자행했다.
1980년 5월 금남로는 “많이 죽이는 자가 애국자라는 학살 원흉(전두환)의 말(을) 따라 마구 쏴버리고 마구 찔러대는 거리였다.”(고은, <금남로>) 1980년 5월 광주에 출동했던 계엄군은 자신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폭력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극대화된 형태로 짐승들처럼 남김없이 사용했다. 계엄군의 몸으로부터 국가폭력이 과잉분출 되면서 시민들이 학살당한 것이다.
12월 3일 밤 계엄군 역시 국가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여의도에 출동했다. 그러므로 계엄군이 시민을 대상으로 행사하는 폭력은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친위 쿠데타 세력은 계엄군을 향해 “명령 불응 시 항명죄로 다스린다”며 압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은 결코 도덕적·윤리적으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는 국가폭력 행사를 극도로 절제했다. 그렇게 여의도에서는 1980년 5월 피로 물들었던 광주의 역사를 비껴갔다.
계엄군은 여의도라는 그 장소 그 시간에 “항명죄‘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훈련으로 자신의 몸에 충분하게 내재된 승인받은 국가폭력을 가시화 하는 것을 거부했다. 계엄군 자신의 몸으로부터 폭력이 발현될 수 없도록 그 입구를 묶어 봉인한 것이다.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는 그렇게 계엄군에 의해 의도된 실패로 끝났다.
여의도로 향한 시민들
12월 3일 밤 윤석열이 불법계엄을 선포한 직후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할 수 있도록…국민 여러분, 이 나라 민주주의를 강건하게 지켜낼 수 있도록 지금 국회로 와 주십시오”라며 유튜브 채널을 통해 호소했다.
이재명 대표의 호소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매체를 통해 불법계엄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일상을 포기하고 급하게 여의도로 향했다.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함께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청 앞 금남로를 향해 달려갔던 그날의 광주 시민들처럼.
어떤 시민은 광주를 기억하며 몸을 먼저 움직여 여의도로 달려갔다. 또 어떤 청년은 광주를 경험한 부모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며 여의도로 향했다. 어떤 직장인은 해고될 것을 각오하고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친 채 여의도로 달려갔다. 시민들은 각자 다른 장소에서 각자 다른 상상을 하며 비슷한 시간에 여의도로 결집했다. 그들은 간접경험이 되었든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의해서든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구하고 자신을 구하는 것이란 생각으로 서로가 공명하며 여의도로 달렸다.
윤석열이 불법계엄을 선포한 직후 국회에는 완전 무장한 특전사들이 출동했다. 11시 경 경찰이 국회 정문을 봉쇄했다. 11시 50분 경 헬리콥터들이 굉음을 내품으며 국회 본청 뒤편 운동장에 착륙했다.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로 난입하고 창공을 가르며 헬리콥터들이 착륙하던 장면은 흡사 내전이 발발한 것으로 보였다.
12월 4일 새벽 1시 경 국회에서 <비상계엄령 해제 요구 결의안>이 가결된 직후 계엄군은 여의도를 떠났다. 12월 3일 밤 여의도에 모인 시민세력이 승리한 대사건이 역사에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4일 오전 4시 30분 경 윤석열은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 해제를 선언했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약 6시간 만에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 시도가 막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은 제2차 계엄이 선포될 가능성을 예상하며 동이 틀 때까지도 여의도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은밀한 약속이 지켜진 그날 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 동안 대학살을 끝낸 직후, 전두환 계엄사령부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127명, 군인 109명, 경찰 144명이 부상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수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체포될 수 있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당시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이 사망자 수에 대해 유가족들과 광주 시민들은 신뢰하지 않고 있다. 의도적인 축소는 물론 죽음을 당한 이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보내진 많은 사람들이 사망자 수에 포함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광주 시민들은 그래서 일반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망자 수에 대한 공식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의 사망자는 당시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것보다 훨씬 많은 약 1,000~2,000명이며 민간인 부상자도 1,800~3,500명 정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등 매우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위키백과)
12월 3일 밤 계엄군은 여의도에서 계엄령 해제를 막기 위해 윤석열이라는 권력자의 “총을 쏴서라도 (국회의원들을)끌고 나오라(죽이라)”는 명령을 수행 중이었다. 그 위태로운 순간에 5·18 광장에 모였던 학살당한 광주 시민군들이 좁은 문을 뚫고 나타나 준엄한 표정으로 계엄군을 응시하며 시민들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여의도의 계엄군은 “항명죄”라는 압박에도 개의치 않고 윤석열의 명령에 따르는 대신 5·18 광주 시민군들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을 선택했다.
죽이지 말라는 이 숭고한 명령에 대한 순종은 불법계엄을 주도했던 파시스트 내란 세력에게는 결코 드러나지 않은 5·18 광주 시민군과 12·3 여의도에 출동한 계엄군 사이에 이루어진 은밀한 약속이었다. 12월 3일 밤 여의도에 모인 시민들에게 5·18 광주 시민군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간절하게 기다렸던 사람들이었다. 필연적으로 5·18 광주 시민군이 여의도에 와서 함께 항쟁할 수 있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은밀한 약속이 지켜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3 여의도 민주항쟁
그날 밤 국회의원들은 불법계엄을 해제하기 위해 서둘러 국회담장을 넘어 국회의사당으로 집결했다. 국회의원 보좌진은 분초를 다투며 국회의원들이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할 수 있도록 국회의사당 안에서 경내에 강제 진입을 시도한 계엄군과 필사적으로 대치하며 저항했다. 시민세력 또한 국회의사당 밖에서 계엄군을 대상으로 항쟁했다.
어느 순간 흔들리는 눈빛과 함께 고개를 숙인 계엄군은 시민들을 향해 겨누었던 총부리를 거두었다. 5·18 광주 시민군과 12월 3일 밤 여의도에 출동한 계엄군 사이에 이루어졌던 은밀한 약속이 지켜진 순간이었다. 무도한 내란 세력의 헛된 욕망은 그렇게 해체되었다. 한편으로 국회의원을 비롯한 시민세력과 여의도의 계엄군 사이의 대치가 끝나고 내란 세력을 대상으로 연합전선이 형성된 것이기도 했다.
이질적으로 조합된 이 이중 삼중으로 연합한 세력이 보여준 저항의 몸짓은 역사의 물줄기를 ‘죽음’에서 ‘삶’으로 바꾸는 과정을 보여줬다. 죽은 자들과 산 자들과의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약속이 지켜진 까닭이었다. 12월 3일 밤 여의도에서 계엄군을 포함한 시민세력과 5·18 광주 시민군 서로가 시공간을 초월해 공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서로가 공명한 시민세력과 계엄군의 힘이 내란 세력의 힘을 압도했던 것이다.
윤석열이 불법계엄을 선포한 12월 3일 밤 여의도에서 국회의원·시민세력·계엄군은 연합전선을 형성하며 내란 세력에 항쟁했다. 그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의미의 전달이 불충분한 ‘12·3 내란의 밤’이라고 가볍게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날 밤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각 주체들이 가졌던 역사적 인식과 행동하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12·3 여의도 민주항쟁’으로 수정해 명명하고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 ‘12·3 여의도 민주항쟁’에 참여했던 시민세력이 국회에서 윤석열이 탄핵되고 헌재에서 파면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참여해 투쟁한 사실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1980년 5월 광주 시민군은 구원의 씨앗이자 메시아
학살당한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군은 역사의 구천을 배회하는 유령이 아니다. 광주 시민군은 살아있는 실체로 12·3 여의도 민주항쟁에 양심이란 이름표를 달고 찾아 왔다. 이 양심은 계엄군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계엄군이 “항명죄”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용기를 내어 그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시민세력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있었다.
윤석열은 계엄을 선포하기 전 이미 수개월 전부터 수천 개의 영현백을 준비했다. 이러한 정황상 12·3 여의도 민주항쟁 과정에서도 광주에서처럼 계엄군의 손에 의해 대량학살이 자행될 가능성이 매우 컸다. 만약 계엄군이 내란 세력의 명령에 따랐다면 어땠을까. 청년들로 구성된 이 젊은 계엄군들은 자신의 미래를 빼앗긴 채 윤석열의 살인병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을 것이다. 이 계엄군들의 운명을 바꾼 것은 12월 3일 밤 여의도를 찾아온 양심이라는 1980년 5월의 광주 시민군이었다.
그동안 우리에게 패배한 역사로 인식되어 왔던 5·18 광주 민주항쟁이 미래에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이 패배한 역사에 내포된 의미가 12·3 여의도 민주항쟁 과정에서 드러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5·18 광주 시민군은 12·3 여의도 민주항쟁 과정에서 모두의 목숨을 살린 씨앗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44년 동안 잠재된 형태로 역사라는 그릇에 담겨졌던 그 씨앗은 12·3 여의도 민주항쟁 과정에서 구원이라는 생명체로 발아하면서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로써 우리는 44년 전 5·18 광주 민주항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시민군에 대해 패배자가 아닌 메시아이자 구원자로서 승화된 승리한 역사로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내란 세력은 12월 3일 밤 여의도가 피로 물들고 비탄의 목소리가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도록 설계했다. 5·18 광주 시민군은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대량의 학살계획을 계엄군의 몸을 빌려 무력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가 현재를 도왔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 5월 광주가 그랬듯이 2024년 12월 3일 여의도의 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꽂혀 정지한 혁명적 시간이었다. 시간이 정지한 이 시점에서부터 대한민국의 시계는 내란 수괴 윤석열이 파면 당한 2025년 4월 4일을 향해 거침없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때
윤석열이 집권한 지난 3년은 대한민국이 궤도에서 이탈해 폭주한 시간이었다. 특히 12·3 계엄 이후부터 6·3 조기 대선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은 대한민국이 초현실주의적인 세계를 부유하는 듯했다.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시간은 끝났다. 이제부터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해야 할 시간으로 전환된 것이다.
궤도를 이탈했던 3년은 우리에게 주름지고 얼룩진 시간이다. 이재명 정부는 이제 과거가 된 궤도에서 이탈되었던 시간을 궤도 안으로 끌어 잡아 당겨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주름진 시간을 낱낱이 해부해 주름과 얼룩을 제거하고 정화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지금 현재도 내란 수괴 윤석열이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이재명 정부는 내란 세력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말고 전광석화처럼 과거를 도와 죽은 자를 구하기 위해 밀고 나가길 바란다. 이미 여러 개의 특검활동이 시작되었다. 현재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 과거를 돕고, 살아있는 이재명 정부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미래라는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