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이재명을 못 죽여서 안달이었을까?
기득권 없애려는 '예언자' 제거하려 안간힘
속물들의 추잡함 들추어내자 이단자로 몰아
비상식 실천 세력 남아 있는 한 혁명은 미완
각자 노력해 혁명 이후 가야 할 방향 찾아야
1. 혁명이 끝났다는 착각
내란부터 대선까지, 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다. 이불과 베개가 흠뻑 젖을 만큼 지긋지긋한 악몽을. 이제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이재명이 대통령 되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끝인가? 민주당에 개헌저지선을 상회하는 의석을 주면 끝인가? 그날이 오면, 이제 천지가 개벽했으니 발 뻗고 자도 된다는 말인가?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 꿈에서 깨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꿈은 몽중몽이자 또 다른 악몽이다.
혁명은 상식을 바로잡는 것이다. 문제는 상식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헌법에 써놓는다고 상식이 아니다. 대통령 하나 잘 뽑는다고 상식이 바로잡히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선택을 상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식적인 선택지만 살아남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비상식적인 선택지가 상상 속에서조차 자연스레 배제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혁명이 완성된다. 여차하면 비상식을 실천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남아 있는 한, 혁명은 미완으로 남기 때문이다.
2. 우리는 모레스 안에서 산다
요즘 세상에, 누구 하나 콕 집어 화형을 시키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상식이었던 때가 있었다. 이단 심문소가 합법적으로 가동되던 13세기의 일이다. 당시에는 누구라도 한번 이단으로 잘못 찍히면 전재산이 몰수되고 고문 끝에 죽음을 맞게 됐다. 종교재판의 잔인함도, 그것을 상식으로 여기던 사람들의 냉소도 물론 경악스럽다.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대체 무엇 때문에 '상식'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정반대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었냐이다.
사회학자 섬너는 '모레스(mores)'가 바뀌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모레스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자기도 해야 한다고, 그래서 그것이 즐겁고 좋고 맞다고 느끼는 행동양식을 가리킨다. 섬너는 바로 이 모레스에서 도덕(moral)뿐만 아니라 법과 제도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모레스는 그 사회의 세계관을 낳고 세계관은 모레스를 강화한다. 모레스에 어긋나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합법적으로' 추방이나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적응하지 못한 동물이 자연스레 죽는 현상을 자연선택이라 부르듯이, 섬너는 이러한 현상을 '사회선택'이라 부른다.
우리는 모레스 안에서 산다. 특정 브랜드의 옷을 교복처럼 입는 일, 남들 하는 만큼만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여기는 일, 저들의 부패는 눈감아주면서도 이들의 티끌은 악 중의 악이라 여기는 일 등이 우리 주위의 전형적인 모레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레스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레스는 정도를 벗어나기도 한다. 모레스를 따라도 좋을 게 하나 없는 때, 오히려 나쁜 점이 더 많을 때가 그렇다. 이걸 먼저 알아차리는 사람들을 섬너는 '예언자'라 부른다. 모레스는 예언자들이 바꾼다. 예언자들이 이끄는 모레스의 변화가 바로 '혁명'이다.
그러나 섬너는 예언자들의 절망스러운 운명을 담담히 적었다. "예언자들은 항상 곤경에 처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예언이 달갑지 않았고,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처한 상황은 곤경이라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로 끔찍하다. 그들은 곧 '사회선택'의 희생자가 되기 때문이다. "의견을 달리함은 그러한 의견을 가지는 사람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증오와 박해를 유발한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은 반역자, 배신자, 그리고 이단자로 간주된다." "얼마 있지 않아 사람들은 이단 고발이 정적(政敵)을 공격하는 유달리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3. 예언자 죽이기라는 모레스
우리는 어떤 모레스에 살고 있었을까? 우리가 살던 모레스, 썩어 문드러져 구역질이 나는 이 모레스는 20여 년 전 어느 예언자의 연설에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
"조선 건국 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 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됐다. 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 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며 살아라’,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 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 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그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모레스를, 우리는 과연 청산했는가? 아니다. 오히려 청산된 것은 그 모레스를 지적한 예언자였다. 그는 모레스의 역겨움을 들춘 죄로 이단이 됐다. 예언자 죽이기라는 모레스는 오히려 더욱 공고해졌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단으로 지목되지 않는 길은 간단했다. 강자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생존과 동맹이라는 질서에 편입되는 것, 그게 어렵다면 힘을 숭배하는 열렬한 신도라도 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처한 모레스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예언자 죽이기라는 모레스의 또 다른 모습은, 바로 '깨끗한 자만 더러움을 지적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회선택이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교급'이 없다. 언제나 '최상급'이다. 한편 예언자는 모레스의 더러움을 지적하는 인물이다. 그런 예언자를 도리어 이단으로 전락시킬 때 대표적으로 써먹는 방법이 '너도 더럽네? 그럼 죽어'라는 식의 극단화이다.
최근 설난영 씨를 평가한 유시민 작가의 발언에 격렬한 분노를 드러내는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이 이 극단화의 함정에 빠져 있다. 이들의 언어는 짐승 아니면 신이라는 이분법뿐이다. 어쨌든 인간이어서 실수하는 자, 그럼에도 모레스를 지적해 '그나마 깨끗한' 예언자의 자리를, 이들이 앞장서서 지워버린다. 이런 모레스 안에서는 짐승의 수준을 자처하는 '좀 더 더러운' 속물들을 비판할 수 없다. 안타까운 점은 생존과 동맹의 질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불평이 많아 강자에게는 쓸모가 없는 이들은 결국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면서도 힘을 숭배하는 꼴을 면치 못한다. 자기들을 구하러 온 예언자를 앞장서 이단으로 낙인 찍고 죽인 자들이 바로 이런 부류이다.
4. 혁명을 완성하러 온 또 다른 예언자
이때 나타난 괴짜 예언자가 바로 이재명이다. 이재명은 그동안 우리가 알던 전형적인 예언자의 모습을, 티 없이 순결한 자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살면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모레스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살아 왔다. 적당히 속물적인 자가 적당히 신성했던 것이다. 그런 궤적의 삶은 모레스의 수호자들이 하이에나처럼 물어뜯기 딱 좋아하는 인생이다. '상식적'이고 '합법적'이라 일컬어지는 여러 방법으로(그들에겐 암살도 상식이었다) 인간적 삶의 추잡함을 조금이라도 들추면, 예언자는 오히려 자기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사회선택이 바로 그들이 이재명을 못 죽여서 안달이었던 이유이다.
그런데 이재명은 매번 살아남았다. 나는 그가 죽지 않는 한 혁명이 완성될 것이라 생각한다. 오해는 마시라. 그가 했던 실수들을 모조리 옹호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를 덮어놓고 맹종해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그저 그는 여느 인간처럼 잘살기도 못살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는 앞으로도 몇 가지 사안에 대해서는 실수할 것이다. 그를 믿었던 몇몇 사람들이 후회스럽다며 등을 돌릴 것이다. 그가 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증오할 사람들이 앞으로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모를 일이라지만, 나는 그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살아남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모레스의 수호자들은 이 괴짜 예언자를 죽일 방법을 더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갖은 방법을 다 써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식의 변화, 모레스의 변혁, 혁명이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도덕이 단지 '모레스의 세트'일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아마도 섬너를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맞다. 행동만 바뀐다고 혁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 모두가 생각을 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예언자 죽이기라는 모레스가 무효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살던 사회의 모습을 다시 정확히 바라보고, 그 안에 사는 자기 모습을 성찰해야 한다. 경쟁사회라는 이유로 모두가 짐승처럼 살아야 한다고 지껄였던 것은 아니었는지, 인간의 세계에서 무리하게 신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두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최상급의 사회가 비교급의 정치로 변혁되는 꿈만 같은 순간은 비로소 이때에야 도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