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진정한 성장의 출발점

상하위 소득격차 20배 사회 분열 야기

해외 기본소득 실험 긍정적 결과 보여

포괄적 조세 개혁 통해 재원 마련 가능

분배는 성장 포기가 아니라 질적 성장

2025-05-23     김동현 시민기자
소득 격차(PG) 연합뉴스

성장 우선주의의 구조적 한계

한국 사회는 압축 성장의 신화 속에 반세기를 달려왔다. 개발독재 시대부터 민주화 이후까지 경제성장률은 모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할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 우선주의 틀은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

2024년 한국의 소득 분포는 이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상위 10%의 연평균 소득은 2억 1051만원으로 하위 10%의 1019만원의 20배가 넘는다. 이런 격차는 단순한 소득 불평등을 넘어 사회적 이동성의 사실상 봉쇄를 의미한다. 하위 계층이 상위 계층으로 이동하려면 현재 소득의 20배 이상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적 불가능성 앞에 놓여 있다.

 

최상위와 최하위계층 연도별 소득 격차 추이. 연합뉴스

저출생 현상을 둘러싼 담론 역시 이러한 구조적 맥락에서 재해석돼야 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와 성역할 인식 변화는 분명 중요한 요인이다. 과거 '바깥사람'과 '안사람'이라는 이분법적 성역할 구조가 해체되면서 맞벌이 가구가 일반화 됐다. 그러나 근본적 문제는 출산과 양육을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만 떠넘기는 사회 구조에 있다.

여성을 '출산 기계'로 환원하는 관점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본질을 흐린다. 성별에 따른 일반화와 편견에서 벗어나 개인의 역량과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상호 보완적 관계로 작용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를 위계적 구조로 고착화하는 사회적 장치다.

능력주의 신화와 잠재력 발굴의 정치학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또 다른 신화는 능력주의다. '1등 만들기'에 매몰된 교육 시스템과 사회 구조는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양산한다. 그러나 1등은 구조적으로 1명만 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간과한다. 나머지 99%를 실패자로 규정하는 시스템이 지속할 가능성은 없다.

진정한 문제는 개인의 다양한 잠재력을 획일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구조적 경직성이다. 산업화 시대에 최적화된 일자리 구조에 개인을 끼워 맞추는 방식은 개인적 불행과 사회적 손실을 동시에 초래한다. A영역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개인이 B영역의 일자리에 억지로 배치되는 구조적 미스매칭이 만연하다.

인구 구조 변화에 대한 접근 방식도 재고돼야 한다. 인구 감소를 단순히 '더 많이 낳으라'는 구호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부족한 현실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기업이 기술 개발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생산 효율성 향상으로 대응하듯, 인구 정책도 양적 확대보다 질적 향상에 집중해야 한다.

진로 교육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현재의 교육 시스템은 개인의 적성과 사회적 필요를 연결하는 장치가 부재하다. 생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잠재력을 포기하는 구조적 강제가 지속되는 한, 사회 전체의 창의성과 생산성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출생기본소득 3법(아동복지법 일부개정법률안,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 아동수당법 일부개정법률안) 발의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6.17. 연합뉴스

기본소득 실험과 재분배 정치의 실증적 근거

기본소득에 대한 회의론은 주로 '근로 의욕 저하'와 '재정 부담'에 집중된다. 그러나 최근의 해외 실험 결과들은 이러한 우려가 실증적 근거를 갖지 못함을 보여준다.

핀란드의 2017-2018년 기본소득 실험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무작위로 선발된 2,000명의 실업자에게 월 560유로를 조건없이 지급했다. 수급자들의 정신적 건강과 삶의 만족도가 현저히 개선되었고, 생존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자 오히려 더 적극적인 경제 활동이 나타났다.

케냐에서 진행 중인 GiveDirectly의 장기 기본소득 실험 역시 유사한 결과를 보인다. 12년간 매월 22달러를 지급받는 마을과 일시불로 지급받는 마을의 대조군을 비교한 결과, 기본소득 수급 마을에서 창업과 교육 투자가 크게 증가했다. 특히 여성들의 경제 활동 참여율이 급격히 상승했다.

이러한 실험 결과들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기본소득은 게으름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창의성을 촉진한다. 생존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면 개인은 더 장기적이고 의미있는 활동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소득 도입에 대한 가장 현실적 장애물은 재원 마련이다. 이는 기술적 문제라기보다 정치적 의지의 문제다. 포괄적 조세 개혁을 통한 다각적 접근이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다.

첫째, 토지보유세 강화다. 토지는 개인이 창조한 가치가 아닌 사회적 가치의 산물이다. 지하철역 주변 땅값 상승은 개별 토지 소유자의 노력이 아닌 사회적 투자의 결과다. 토지 보유에 따른 세금을 점진적으로 강화하면 투기적 수요를 억제하면서 안정적 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탄소세와 환경세 도입이다. 기후위기 대응과 재원 마련을 동시에 달성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탄소 배출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내재화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논리에도 부합한다.

셋째, 디지털세 신설이다. 구글, 아마존, 메타 등 글로벌 기술 기업들이 한국 시장에서 창출하는 막대한 부가가치에 대한 합당한 과세가 필요하다. 이들 기업은 한국의 디지털 기반시설과 인적 자원을 활용해 수익을 창출하지만, 세금은 본사 소재국에만 납부하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사회적 신뢰 회복과 포용적 성장 모델로의 전환이 핵심이다.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한 재분배 정책은 단순한 복지 확대가 아니다. 이는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구축하는 전략적 투자다.

현재의 극심한 불평등 구조는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한다.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20배 격차는 단일한 사회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했다. 이러한 분열은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위협한다.

결국 분배 우선주의는 성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의 질적 전환을 추구한다. 소수의 승자 독식 구조에서 벗어나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포용적 성장 모델로의 전환이다. 이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미래 사회의 청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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