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만 있는 경제 공약…분배 빼면 '앙꼬없는 찐빵'
후보들 경기 침체에 AI 육성 등 성장에 방점
실제 내용은 기업 지원 일색…가짜 성장론
소득재분배 1p 개선하면 성장률 0.15p 상승
불평등 방치하면 생산성 떨어져 성장 발목
부·소득 불평등 해소 없이는 성장도 불가능
지금처럼 내수 경기 침체와 수출 둔화 추세가 이어지면 올해 경제성장률은 0%대에 그칠 확률이 높다. 경제가 성장하지 않으면 국민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없다. 그러나 ‘성장’만 외친다고 실제로 경제가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부와 소득의 쏠림은 성장 동력 약화시켜
노동과 자본, 기술의 투입량이 많고 경기가 좋아 수요가 풍부하다면 경제 성장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은 성장에 필요한 요소들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적·물적 자원이 한쪽에 쏠리면 성장 동력은 약화할 수밖에 없다. 적절한 곳에 필요한 자원이 배분되지 않으면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특급 인재가 대기업에만 몰리면 중소·중견기업은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도 성장하기 쉽지 않다. 반면 인력이 넘치는 대기업은 유능한 인재가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얻기 힘들다.
자본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은 사내 유보금이 넘치고, 기술력이 있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은 투자할 돈이 없어 성장 기회를 놓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근로소득보다 금융소득이나 임대소득이 높아 돈이 부자에게 쏠리면 중산층 이하 계층에 골고루 돈이 배분되는 상황보다 소비를 활성화하기 힘들다. 부와 소득 양극화가 심해지면 일부 사치재 소비는 늘어날지 몰라도 대다수 국민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중소기업 제품이나 서비스 수요는 줄어든다.
부와 소득재분배 강조한 ‘포용적 성장’이 세계적 추세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들이 지지하는 ‘포용적 성장론’은 분배가 성장의 핵심 원동력이라는 경제 이론에 바탕을 둔다. 성장률이 떨어진다고 성장만을 이야기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진정한 성장론이 아닌 기업 지원 정책을 정당화하는 궤변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2017년 5월 발간한 경제주평에서 ‘한국, 더 이상 경제성장의 모범국가가 아닌가?-분배가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주요 43개국 경제 변수로 구성된 동적패널모형을 활용해 분배의 경제 성장 효과를 분석했다. 요지는 소득재분배가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모형에 근거해 추정한 결과 인적 자본과 물적 자본 투입이 각각 1%씩 상승하면 경제 성장률 개선 효과는 0.18%포인트와 0.12%포인트였다. 소득재분배의 성장률 개선 효과는 빈부격차와 계층 간 소득의 불균형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근거로 측정했다. 그 결과 소득재분배가 1포인트(시장소득 지니계수-가처분소득 지니계수, 100점 기준 지니계수) 개선됐을 때 성장률은 0.10%포인트 추가 상승할 것으로 예측됐다. 성장과 분배가 동시에 개선된 10개국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는 물적 자본과 소득재분배의 성장률 개선 효과가 각각 0.20%포인트, 0.15%포인트에 달했다. “분배가 곧 성장이고 성장이 곧 분배”라는 점을 보고서가 실증한 셈이다.
이재명 ‘기본사회’ 부와 소득 불평등 해소가 핵심
상식적으로나 학술적인 실증 모두에서 분배가 성장을 촉진한다는 사실이 분명한데도 21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주요 후보의 경제 공약을 보면 ‘분배’라는 말이 눈에 띄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22일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국가 공동체가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겠다며 ‘기본사회위원회’ 설치 공약을 내놓았다.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에 대한 분배는 기본사회의 핵심 가치다. 그런데도 공약에 구체적인 분배 정책이 빠져있다.
이에 비해 이 후보의 ‘성장’ 공약에는 세부 내용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인공지능(AI) 강국 도약하는 방안으로 AI 예산 비중을 선진국 수준 이상으로 증액하고, 민간 투자 100조 원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AI 데이터센터 건설을 통한 ‘AI 고속도로’를 구축하고 고성능 GPU(그래픽처리장치) 5만 개 이상을 확보한다고도 약속했다. 국방과 문화 부문의 경쟁력을 높여 수출 실적을 높이는 방안에 대해서도 목표 수치를 제시했다. 대략적인 방향만 제시한 기본사회 공약과 대조된다.
대기업 쏠림을 완화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려면 재벌 개혁이 필수적인데도 이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공약도 찾아보기 힘들다. 재벌 총수 일가의 전횡을 막고 이사회의 독립을 강화하기 위한 상법 개정 등 기존 민주당 정책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재벌 개혁은 몇 개 법안을 개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과 신기술을 보유한 벤처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경제 시스템 자체를 개혁해야 달성할 수 있다.
기업 지원을 유일한 성장 정책으로 보는 김문수·이준석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는 ‘분배’에는 아예 관심이 없는듯하다. AI 관련 공약은 이재명 후보와 대동소이하다. 세계적인 기업이 참여하는 민관합동 펀드 100조 원 조성과 AI 유니콘기업 지원 확대, 차세대 GPU·NPU(신경망처리장치)·HBM(고대역폭메모리) 등 원천 기술 개발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주요 내용이다.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기 완공과 AI 반도체 자주 국가 수립, K-반도체 3대 초격차로 달성 등 경제 공약의 대부분이 대기업 지원에 관한 것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의 성장 공약도 리쇼어링 정책 등 기업 지원 일색이다. 김문수 후보나 이준석 후보 모두 ‘기업 지원=경제 성장’이라는 편협한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금 가장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방법은 불평등을 개선하는 일이다. 인적·물적 자원이 대기업에서 중소·벤처기업으로, 소득 상위계층에서 중산층 이하 국민으로 흘러가도록 경제구조를 개혁해야 한다. 이렇게 큰 그림을 보여준 뒤 세부 공약을 제시해야 이해하기도 쉽고 설득력도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