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핵 무장론', 자민당식 장기 집권 시나리오?
미국 NPT와 일본 핵무장 부를 한국 핵무장 반대
그러나 북이 핵 보유국이 되면서 미국 입장 변화
핵무장 바라는 한국의 보수 집권세력과 기득권층
일당 장기집권 일본 자민당식 시나리오로 갈까?
미국이 한국의 핵 개발을 반대하는 이유
미국이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막고 있는 이유는, 우선 자국이 주도한 핵확산금지조약(NPT) 때문이다. 또 하나는 동아시아 동맹국들에 대한 자국의 핵 독점을 견지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정권 때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지낸 더그 밴도(Doug Bandow)가 17일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에서 주장한 얘기다.
지금 미국의 보수적인 싱크탱크 카토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있는 그는 미국이 한국에 핵 개발을 허용한다면, 이웃 일본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고 본다. 그렇지 않아도 기시다 후미오 정권은 적 기지 공격 능력까지 명기한 새 안보정책을 통과시키고 이를 위해 국방비를 지금의 2배로 늘리는 등 기존의 전수방위 원칙을 내버리고 본격적인 군비증강에 나선 판이다. 그리고 고령화와 출산율 감소로 장차 지금의 군대 규모조차 유지하기 힘들게 될지도 모른다. 2050년까지 약 2000만(총인구의 17%)명의 인구가 줄어들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니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면 일본도 당연히 핵 개발에 나설 것이고, 미국은 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며, 핵을 보유한 이들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정답’이었다.
'한국 핵 개발 불가' 상황이 바뀌었다
하지만 한국의 핵 개발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은 지나갔다고 더그 밴도는 주장한다.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상황 변화의 핵심은 북한이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됐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핵폭탄 보유를 허용할지 모른다”는 제목의 그 기고문에서, 밴도는 예전엔 터부였던 한국의 핵 개발 허용이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게 된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한다.
북은 이미 핵 보유국
첫째는 이미 지적했듯이 북한이 이미 핵 보유국이 됐다는 사실이다. 북한의 핵 보유를 막으려던 미국의 시도가 막다른 골목에 처한 상황에서 북이 이미 핵 보유국이 된 현실은 미국과 한국에서 핵 정책을 둘러싼 심각한 논란을 촉발했다. 이런 상황에서 CVID(확실하고, 검증할 수 있으며, 불가역적인 해체)의 북 비핵화를 추구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 논란의 중심이다. 미국은 지금 북이 핵 보유국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고 있으나, 밴도는 현실이 결국 그런 공식입장을 후퇴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핵무기로 맞대응하려는 한국 기득권층
두 번째 이유는, 이런 변화 속에서 한국의 기득권층이 핵무기를 손에 넣거나 미국의 핵무기에 접근할 수 있기를 강력하게 바란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핵무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치기까지 했다. 밴도는 다수의 한국 관리들이 ‘전략 자산’(핵무기)을 유럽의 핵 공유 형태로 한반도에 배치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특히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의 성실성, 내구성을 의심하는 한국 내의 냉소주의자들이나 현실주의자들은 자국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바라고 있으며, 워싱턴의 일부 정책입안자들도 그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고 밴도는 지적했다.
내년 총선 등 한국 정치 판세를 바꿀 핵폭탄
밴도가 언급하진 않았지만, 한국의 이런 분위기는 내년의 총선, 나아가 그 뒤의 대선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주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핵무기 보유국 북의 핵 능력 제고와 이에 대응하는 한국의 핵 개발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선거판을 좌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집권세력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패가 될 수 있다. 지난해 말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한국을 "명백한 적"으로 규정하면서 "전술핵무기 다량 생산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부각시켜주고 나라의 핵탄 보유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은 이른바 '북핵'과 북한에 대한 한국인들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으면서 북한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주장이 설 자리를 앗아갔다. 최근에 공표된 여러 여론조사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응답자들은 한국의 핵무장과 자체 핵무기 개발을 지지한다는 쪽이 반대보다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선택지가 별로 없는 야당
만일 이 문제가 총선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로 부각될 경우 야당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핵무기 보유 또는 배치, 자체 핵 개발에 대한 적극 지지나 단호한 반대 어느 쪽도 위험부담이 크지만,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경우 더 많은 표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 보수우파 집권세력이 대북 강경책을 앞세우면서 압도적인 핵 개발 기술로 맞서 이기자는 식의 선동적 핵무기 내셔널리즘을 선창할 경우 야당으로선 대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포퓰리스트적 정파세력이 이런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증폭시킬 경우 선거 판세뿐만 아니라 정치 지형까지 바꿀 수 있다. 군사정권 시절의 '북풍'이나 1990년대의 '총풍'사건처럼 북의 도발을 유도하거나 북과 공모해서 선거판세를 뒤집으려 했던 지난 시기의 악몽이 되살아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북한 지도부는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21세기식 '총풍'의 한쪽 당사자가 돼 버릴 수 있다. 그러면 한국정치는 더욱 왜곡되고 남북관계 등 국내외 정세 전반이 심각한 국면에 봉착할 수도 있다. 이 난제를 풀겠다는 적극적인 자세와 지혜가 야당에게 필요하다.
미국은 확장억제에 대한 거듭된 이행 약속, 동맹관계의 “반석 같은 토대”를 강조하면서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불문하고 모든 방위능력을 동원해 안보공약을 지키겠다며 핵무장론을 일정한 수위에서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보증”은 이제 별로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고 밴도는 주장한다.
우크라이나의 비극
예컨대 우크라이나의 경우 1994년에 부다페스트 협정을 맺었으나 러시아의 침공을 막지 못했다. 소련 해체 뒤 소련의 핵무기들이 배치돼 있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이 러시아, 미국, 영국과 맺은 부다페스트 협정은 이들 옛 소련 공화국들이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겨 주는 대신 주권과 영토를 보전하고, 무력 및 핵무기 사용이나 그 위협, 침략 또는 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며, 위반시에는 유엔 안보리 차원의 즉각적인 지원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중심이 된 그 다국적 합의도 지켜지지 않았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유엔은 작동 불능상태다. 우크라이나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피난을 떠났으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나라의 기간시설 절반 이상이 파괴됐다. 미국 등 서방의 지원 아래 대리전적 성격을 띤 전쟁은 시작된 지 이미 1년이 다 돼 가는데도 끝날 기미가 없다.
미국이든 러시아든 철저히 자국 이익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한국전쟁 때도 그랬다고 밴도는 지적한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남북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에게 전쟁 계속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기존 38도 선과 유사한 분단선 복구가 자국 이익에 가장 부합한다고 판단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확장억제 약속을 끝까지 지킬까
지금 푸틴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군의 공세가 러시아의 안전을 위협할 경우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미국 등 서방은 이에 반발하면서 강력한 경고를 보내고 있지만, 그들의 지원은 러시아에 핵무기 사용 명분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만일 북한이 핵무기의 정밀도와 위력을 개선해 미국의 도시들을 직접 위협할 정도의 핵 보유국이 됐다면, 그리고 미군과 한국군의 공세가 북의 영토를 침범하는 등 체제를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북한이 이에 대해 핵무기 사용 최후통첩을 발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고 밴도는 얘기한다. 우크라이나와 유사한 그런 상황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한국과의 확장억제 공약을 지키기 위해 자국 도시들과 수백만 명의 자국민을 희생시킬지도 모를 ‘도박’을 감행할 수 있겠느냐고 밴도는 묻는다.
그게 불확실하다면 당연히 한국인들도 미국 공약의 내구성과 성실성을 의심할 것이고, 미국의 핵으로 무장하든 핵무기를 자체 개발하든 북의 핵무기에 맞서 자체 핵무기를 가지려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내 여론은 그쪽을 압도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핵 개발 권장하진 않겠지만 배제하지도 않을 것
오하이오 주 하원의원 스티브 채벗은 미국정부가 일본, 한국과 마주앉아 이 두 나라의 핵 개발 문제에 대한 협의를 시작하라고 제안했다. 그 편이 실제 핵 개발까지 가지 않더라도 중국을 자극해 북한을 자제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채벗은 주장했다. 하지만 밴도가 보기엔 그런 시도는 이미 무의미하다. 그것은 마치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닫으려는 것이나 같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핵 개발 '자제'를 거론하는 게 무의미해진 핵 보유국이 됐는데 무슨 소릴 하느냐는 얘기다.
미국이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처벌하거나 제재할 생각이 없고 북한의 핵무장을 멈출 수 없다면, 한국과 일본의 핵 개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미국이 이들 나라의 핵 개발을 장려하진 않겠지만 허용할 가능성까지 배제할 순 없다. 이 모든 상황변화는 북한이 이미 핵 보유국이 됐고 핵탄두를 미국 본토까지 쏘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그 정밀도와 위력을 높인 현실에서 비롯됐다. 이것이 밴도의 생각이다.
그리고 한국의 핵 개발을 막으려면 미국은 지금까지 공언해 온 확장억제 공약 이상의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일본 자민당 장기집권 시나리오처럼
이는 결국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더 강화하라는 얘기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더욱 위기를 느끼게 되고 핵무장 노력을 더 강화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다시 한국의 강성 여론을 자극해 보수우파 집권에 유리한 정세를 조성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진보세력을 집권이 불가능한 영원한 소수파로 동결시킨 일본 자민당의 장기집권 시나리오(보수합동 '55년 체제')를 연상케 하는 이런 메커니즘은 미국과 일본의 보수우파들이 한국정치에서 기대하는 최선의 구도일 수 있다.
더그 밴도류의 주장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이런 현실의 악순환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남과 북의 화력이 너무 크고 서울과 평양간 거리가 가까워서 “전쟁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기도 전에 모두 끝장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는 한 외교관의 말을 인용한 <파이낸셜타임스>의 서울지국장 크리스천 데이비스의 칼럼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겐 농담 같은 '남의 얘기'일 수 있겠지만 남북한에겐 존망이 걸린 문제일 수 있다. 이미 70여 년을 그렇게 살아 왔다.
핵무기 개발이 촉발한 전쟁위기 논란이나 준전시 분위기는 포퓰리스트 정파에겐 정치적 이득을 안겨 줄 호재가 되겠지만, 수출과 해외투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 전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북한의 체제 안전에도 득 될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