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선과 진보정당들의 선택, 어떻게 볼 것인가
광장 연합 위해 민주당과 단일화한 진보당 선택
진보적 정책들 얻어내며 이후 선거서 도약 기대
독자적 진보정치 위해 완주 선택한 민주노동당
민주당으론 부족한 노동자, 소수자 위한 목소리
장단점과 함께 더 어려워진 진보정치 현실 반영
냉철한 평가 속에 더욱 치열한 고민과 연대 필요
이 나라의 정치 지형은 오랫동안 너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일당 독재와 군사 독재에 뿌리가 있는 부패한 극단적 우파 정치세력이 '보수'를 자처하며 계속 권력을 잡아 왔고, 반면 반공주의와 종북몰이 속에서 민주당조차 '좌파'라고 공격받아왔다. 이런 한국 사회를 유럽의 선진국들처럼 합리적 보수와 진보가 경쟁하는 정치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열망은 크다.
그런 변화가 가능해진다면 민주당은 중도적 진보나 보수 정도로 자리매김하고, 민주당이 포괄하지 못하는 의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급진적 진보 정치세력들이 등장해서 건전한 경쟁을 하며 한국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더욱 전진시킬 수 있다. 이번 '빛의 혁명'을 거치면서 그런 변화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기고 있다.
실제로 현재 민주당은 중도와 보수를 모두 포괄하는 정당을 자처하면서, 대선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한편, 부패하고 퇴행적인 수구 우파를 대표하던 국민의힘은 윤석열의 쿠데타 실패 이후에 스스로 자멸할지 모를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국민의힘이 해체되거나 분열하더라도 그 공백을 합리적 보수 정당이 채울 것인지는 걱정스럽다.
지금 그 공백을 노리고 있는 이준석 후보와 개혁신당은 '명태균 게이트'의 장본인 중 하나로 낡고 부패한 정치 문화와 구조에 국민의힘과 함께 얽매여 있다. 이준석 후보는 윤석열과 손잡고 '양두구육' 사기극을 펼치고,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걸고 반페미니즘적 혐오 정치와 젠더 갈라치기를 통해 정치적 성장을 추구한 매우 위험한 신우파 정치세력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이번 대선에서도 이준석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 최저임금 삭감과 지역별 차등 적용,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 등을 주장하고 제시하면서 혐오 정치와 갈라치기가 자신의 주요한 무기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있다. 반면, 진보당의 대선 예비 후보였던 김재연 대표는 이런 이준석 후보와 매우 대조적인 정치인이었다.
한쪽은 보수적 젊은 남성이고 한쪽은 진보적 젊은 여성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진보당 김재연 대표는 '페미니스트 대통령 후보'를 자처하면서 차별금지법 제정 등 진보적 과제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재연 후보와 진보당은 주류 언론에서 이준석 후보와 개혁신당에 비해서 거의 1/10 정도의 주목밖에 받지 못했다.
진보당은 개혁신당과 국회 의석수가 같을 뿐 아니라 기초의원 수는 훨씬 더 많았지만 주류 언론의 외면과 홀대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김재연 대표와 진보당은 대선 후보 등록을 앞두고 후보를 사퇴하면서 민주당, 조국혁신당, 사회민주당, 기본소득당과 함께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민주당 이재명 후보 지지로 단일화를 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광장 대선 연합정치'라는 이름의 합의문에는 결선투표제, 선거의 비례성 강화 등 양당 체제를 벗어나 소규모 진보정당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을 담고 있다. 그 밖에도 사회 공공성 강화, 정의로운 생태사회, 검찰과 사법 개혁, 경제적·사회적 불평등 해소, 성평등과 인권, 혐오와 차별 극복, 노동기본권 보장, 남북 간 평화·협력 등의 가치를 담았다.
사실 이재명은 시민운동을 거쳐 진보정당의 길도 고민하다가 민주당으로 간 정치인이고, 이미 15년 전에 성남에서 민주노동당 김미희 후보와 단일화를 한 적이 있다. 이재명 측근과 주변에 진보정당 출신 활동가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민주당은 박근혜 정권의 종북몰이가 몰아치던 2013년부터 의식적으로 진보당과 거리를 두고 정의당하고만 선거 연합을 해 왔다.
민주당이 다시 진보당과 선거 연합을 시작한 것은 10년도 넘게 지난 지난해 총선 때부터였다. 여전히 족벌언론과 수구 우파들에게 진보당은 '종북'으로, 민주당은 '종북의 숙주'로 공격받는 상황에서 부담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노동운동과 지역사회에 무시 못 할 기반을 가진 진보당과 손을 잡는 것이 손해보다는 이득이 더 많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진보당도 내란 종식의 대의를 내세우며 집권 가능성이 큰 민주당과 단일화를 통해 진보적 정책들을 얻어내고 존재감을 남기면서, 이후에 지방선거나 총선에서 도약의 기회를 얻겠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약속받은 결선투표제 등은 사표 심리를 줄이면서 진보정당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더구나, 현재의 선거 제도와 규정에 따라서 진보당 김재연 후보는 어차피 대선 후보 TV 토론도 못 나오는 처지였다. 황교안 같은 극우 후보들과 '나머지 TV 토론' 자리에 끼어서 느낄 모멸감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관련해서 민주노총에서도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정책협약을 맺고, 이재명 후보도 투표할 수 있는 후보 중에 하나로 열어두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보정치의 독자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반발도 나타나고 있다. 후보 사퇴하고 민주당과 단일화한 진보당에 대해서도 같은 취지의 비판이 나온다. 민주당과도 구분되는 진보의 차별적 목소리를 낼 기회를 포기했다는 비판이다. 더구나 민주당이 과연 '광장 대선 연합정치' 합의문의 추상적인 약속들을 지킬 것인지 믿기 어렵다는 우려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반면에 정의당은 진보당과 달리 노동당, 녹색당, 노동운동 단체들과 함께 연합해서 '민주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권영국 후보를 대선 후보로 출마시켰다. 그리고 단지 '내란 종식과 정권 교체'를 넘어서는 "격차 없는 평등사회", "사회대개혁", "성평등"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양당체제 극복과 독자적 진보정치의 중요성과 목소리를 알리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더구나 현재 권영국 후보는 선관위 규정에 따라서 민주당, 국민의힘, 개혁신당 후보들과 함께 대선 후보 TV 토론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해 놓은 상태이다. 이 기회를 이용해 권영국 후보가 국민의힘과 개혁신당만이 아니라 민주당도 하지 못하는 급진적인 주장과 정책들을 제시하며 소외된 노동자,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장면에 대한 기대가 꽤 있다.
하지만, 그것이 대선 이후에 독자적인 진보정치의 성장으로 연결될지는 알 수가 없다. 역사적, 국제적 경험은 그것이 자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무조건 독자 후보를 출마시켜 완주하지만 고립된 소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상황에 따라서 독자적 출마뿐 아니라 적절한 선거 연합을 결합하면서 집권당으로 성장한 경우도 존재한다.
실제로 권영국 후보와 민주노동당은 현재 크게 의미 있는 지지율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만약 이번에 가능한 모든 자원과 인력을 쏟아붓고도 끝까지 현재 수준의 지지율과 득표 결과에 머문다면, 진보정치의 성장에 별다른 긍정적 효과를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선거보다는 투쟁이 더 중심이고 중요하다는 게 진보좌파의 오랜 입장이었다.
따라서 선거에서 후보나 투표 방침은 정해진 원칙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에 따라 계속 바뀌는 전술 일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투표는 발렌타인 고백이 아니라 체스의 한 수"라는 미국의 저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저술가인 레베카 솔닛의 지적은 타당하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하는 고백이 아니라, 전체 판을 이기려는 전략 속에 배치된 수많은 선택 중 하나라는 말이다.
그렇게 볼 때 이번 대선에서 진보당과 민주노동당의 서로 다른 전술은 둘 다 이해가 가면서도 서글픈 측면이 있다. 둘 다 진보정치 세력의 더욱 어렵고 힘들어진 주객관적 상황과 조건, 그 속에서 몸부림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두 단위의 후보 선출 과정에 참가한 당원이나 선거인단 수는 (진보당이 2배 정도 더 많기는 했지만) 역대 가장 낮은 편이었고, 민주당과 비교하면 거의 20분의 1 수준이었다.
특히 '빛의 혁명'이라는 역사에 남을 투쟁과 대중의 급진화 속에서도 진보정당들이 별로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인됐다. 반면에 이미 당원의 규모가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민주당은 이번 기간을 거치며 더욱 성장했다. 언제나 진보좌파의 중요한 자세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진보좌파의 목소리가 다수인 사회라는 원대한 이상과 달리 현재 진보정당 운동의 30년은 확대재생산이 아니라 축소재생산의 결과를 낳았다.
이제는 '참 마음에 드는데 사표가 될까 봐 못 찍어 주겠다'라는 게 더 이상 진보정당을 가로막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게 됐다. 진보정당을 온전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을 새롭게 더 많이 만들어 무시할 수 없는 힘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과제다. 이런 상황과 조건에서 진보정당들은 1) 이번 대선의 시대적 의미에 알맞은 의제를 제시하고 2) 독자적 진보정치의 필요성을 알리고 3) 진보정치 성장의 기회로 만들며 미래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
가장 서글픈 것은 모든 진보정당의 선거 연합과 후보 단일화는 이제 더 이상 주장하거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진 현실이다. 그러니 민주당은 더욱더 부담 없이 진보정당들 중에 일부와 선택적 연합을 하고서 약속을 잘 지키지도 않게 된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진보정당들과 지지 세력들이 서로 다른 각각의 선택과 전술에 대해 조롱하고 폄하하며 안 그래도 줄어든 파이를 더 깎아내리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동안 쌓여 온 불신과 갈등 때문에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서로의 판단과 전술을 존중하며 결과를 가지고 평가하면서 함께 더 힘을 키우고 모으는 과정을 보고 싶다. 지금 진보정치 세력들에게 필요한 것은 목표와 현실의 커다란 간격을 해결하기 위한 지난 경험에 대한 냉철한 평가, 그것에 바탕한 지혜로운 전술이기 때문이다. 진보정당들이 계속 선을 긋고 갈라지기보다 서로 차이를 인정하면서 힘을 모으는 것은 그 전술의 중요한 일부일 수밖에 없다.
또 그런 연대의 힘이 강력할 때 민주당도 약속을 지키거나 요구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진보좌파는 '나는 세상의 99%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라는 차별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50% 이상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설득해서 결국 그런 다수 대중의 힘으로 아래로부터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수구적 우파와 중도적 개혁을 넘어 진보의 목소리가 다수가 되는 사회를 위한 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