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섹스영화 ‘크래쉬’ 재상영…한국은 오픈된 사회?
29년 만에 '디렉터스 컷'으로 다시 한국 찾아온 걸작
최근 재개봉된 캐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1996년 영화 ‘크래쉬 : 디렉터스 컷’은 감독판이라기보다는 그냥 오리지널 판이다. 1996년 제1회 부산영화제에서, 스크린에 비가 내리는 다 낡은 부영극장에서 상영됐을 때는 과도하면서도 기괴한 섹스 장면 때문에 (지금 와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일부 장면이 10분이나 삭제된 채 상영됐다. 그러니 디렉터스 컷이라기보다는 이 영화를 온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1996년은 여전히 한국 사회가 불완전했던 때이다. 김영삼 정부 때였고 생각과 사상, 예술적 표현의 수위를 온전하게 보장받지 못했던 때이다. (영화에서 검열이 없어진 것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다.) 10분이 잘려 나가긴 했지만 ‘크래쉬’ 상영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저런 상상이 가능한 것이구나, 저런 상상을 해도 괜찮은 것이구나, 하는 사회적 정치적 자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생각하고 사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식 정의가 사실은 매우 폭넓은 것이라는 지점으로 인식을 폭발시켰다. 인간의 생각이 지닌 폭과 깊이란 것이 사회나 체제가 만들어 주는 대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줬기 때문이다.
섹스 중독, 자동차 충돌 중독
영화 ‘크래쉬’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서로의 관계가 뒤엉킨 채로 섹스를 한다. 그들은 침대에서도 하고 차 안에서도 한다. 비행기 격납고에서도 하고 주차장에서도 하며 발코니에서도 한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섹스를 하고 또 한다. 이성끼리도 하고 동성끼리도 한다. 아내는 남편 앞에서 하고 여자는 지금 남자 앞에서 다른 남자의 손길을 받는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끊임없이 차를 가지고 충돌하고 들이받으며 사고를 낸다는 것이다. 섹스할 때의 오르가즘과 차와 차가 충돌하는 바로 그 순간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바로 그것을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여러 남과 여는 후자가 더 큰 쾌감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 차 사고를 통해 스스로들이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상 속에서의 섹스는 그 쾌감의 정도가 낮다. 너무 소프트하다. 인간의 섹스가 자동차 충돌의 쾌감에 더욱 더 가깝게 다가서게 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변형되고, 더욱 더 변칙적이며, 더욱 더 변태적인 것이 필요하다.
영화 속 여인 가브리엘(로잔나 아퀘르)은 차 사고로 두 다리에 보조기를 달고 살아 간다. 주인공 제임스(제임스 스패이더)는 가브리엘의 의족 같은 양 다리 보조기에 강한 성적 충동을 느낀다. 제임스는 좁은 차 안에서 그녀의 꺾이지 않는 보조 다리를 굽히고 벌리기 위해 끙끙댄다. 두 남녀는 그 과정에서 강한 성적 엑스터시를 느낀다. 사고로 크게 다친 적이 있는 헬렌(홀리 헌터) 역시 가브리엘과 같이 본이라는 남자(엘리아스 코티아스)의 사고 차량 안에 기어 들어가 섹스를 한다. 그때의 가브리엘은 보조기 때문에 불편할 수밖에 없지만 두 여자는 그러면서도 기이한 섹스 후의 평온함을 나눈다. 가브리엘이 같이 살고 있는 본은 자동차 충돌 스턴트 액션을 실험하는 것으로 돈을 버는 남자다. 그는 종종 불법 공연을 하는데 청중들 앞에서 실제로 차 사고를 연출한다. 본의 몸은 온통 찢겨져 있거나 불에 데인 상처로 가득하다. 그는 늘 자동차 사고로 죽은 제임스 딘이나 알베르 카뮈, 그레이스 켈리의 차를 복원해 그때의 차 사고를 재현한다. 그는 섹스보다 충돌에 중독돼 있다.
기계문명이 인간의 변이를 가져온다는 문명사적 비판
이야기의 기둥은 영화 제작자인 제임스가 의사인 헬렌의 차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이 둘이 결국 자신들의 사고 차 안에서 섹스를 하게 되고, 주변 인물들이 하나같이 그 같은 섹스에 몰입하고 중독된다는 것이다. 기괴한 페티시즘(사고 차량에 대한)의 소유자인 본은 주인공 제임스에게 자신의 일생일대의 프로젝트(카 크래쉬)에 대해 얘기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그건 결국, 현대 기술에 의한 인간 신체의 재형성에 대한 것이지.” 혹은 ‘충돌시 인간의 저항력이 기계 장치에 주는 영향에 대한 것’이라는 말도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명제도 이쯤 되면 어떤 생각, 어떤 존재냐는 의미로 확장된다. 인간은 결코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며, 그런 착각에 빠져 사는 존재에 불과하고, 인간의 마음 속 심연은 너무 깊어서 어떤 학문이든 영화든 혹은 예술이든 그걸 알아 낼 수 있다고 하는 건 애초부터 너무나 오만한 태도인 셈이다.
정신세계가 남다르고, 일반인들이 봤을 때는 미친 광기의 감독인 크로넨버그는 이미 30년 전부터 트랜스 휴먼, 곧 인간이 어떤 다른 존재로 전이되는 문제와 그럴 때의 정신적 가치나 정체성이 어떤 변화를 가져 오게 되느냐의 문제에 집착해 왔다. 그의 영화 ‘플라이’(1986)는 파리와 인간의 유전자 실험 과정에서 융합기가 잘못 작동되는 바람에 탄생하게 되는 괴물인간의 얘기이다. ‘비디오 드롬’(1983)에서는 TV와 인간의 몸이 섞이게 된다. 크로넨버그는 현대 기계문명이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변이를 가져오고 있다는 문명사적 비판에 힘을 기울여 온 인물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한 과도한 믿음은 결국 인간의 정신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크래쉬’는 바로 그러한 크로넨버그 초창기 영화 시절에 절정기를 이뤘던 작품이다. 이들 영화는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거나 계승되고 있다. 프랑스 쥘리아 뒤쿠르노가 2021년에 만들어 칸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티탄’이 그러한데, 주인공 알렉시아(아가트 루셀)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박고 살면서 점점 이상한 성적 욕망에 시달리다가 결국 자동차와 섹스를 하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완벽하게 ‘크래쉬’의 오마주임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AI시대에 사람들은 챗GPT에 열광하고 딥시크에 환호하며 살고 있으며 새로은 인공지능 로봇이 인류를 대체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욕망까지 실제로 대신해 줄 것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여러 불안증을 안고 살아간다. AI는 인간의 정체성과 충돌할 것인가, 융합할 것인가. 크로넨버그의 30년 전 진단은 결국 대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는 점에 모아진다.
오픈된 사회만이 허용하는 과도한 섹스 신의 걸작
영화 ‘크래쉬 : 디렉터스 컷’은 과도한 섹스 신 때문에 어떤 이들은 보기가 불편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점 때문에 더욱 더 이 영화를 다른 관점으로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런 섹스 영화를 보는 것 자체도 사회가 오픈돼 있을 때에만이 가능하다. 이 영화가 온전하게 오리지널 판으로 상영될 수 있는 현실 역시 최근의 탄핵 인용 과정이 뒷받침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마터면 이런 걸작을 한국에서 더 이상 보지 못할 뻔했다. 그 점에 기시감이 느껴진다. ‘크래쉬 : 디렉터스 컷’은 지난달 26일에 개봉됐으며 전국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