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에어로 유상증자 ‘날림 결의’에 금감원도 제동
“당위성, 주주 소통 미흡” 정정 요구
이사 7명 중 5명은 화상회의로 참석
회의 시간 짧아 충분한 협의 힘들어
외부 전문가 의견 청취도 건너뛰어
졸속 이사회 막으려면 상법 개정해야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기습적으로 발표한 3조 6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이 금융당국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금융감독원이 27일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제출한 유상증자 증권신고서에 정정신고서를 요구한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지난 20일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대해 중점 심사 절차에 따라 대면 협의 등을 통해 면밀하게 심사한 결과 유상증자의 당위성, 주주 소통 절차, 자금 사용 목적 등에서 투자자의 합리적 투자 판단에 필요한 정보의 기재가 미흡하다.”
매년 2조 이익…잉여현금흐름 보면 유증 불필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사회의 대규모 유상증자 결의는 그 시기와 절차, 파장 등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금감원이 이의를 제기한 건 당연하다. 무엇보다 이사회에서 유상증자를 결의할 때 충분한 협의를 거쳤는지 의문이다. 유상증자 소식이 알려진 전후 상황을 보면 이사회 결의가 졸속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한국거버넌스포럼(포럼)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주주총회가 열리기 직전인 지난 25일 발표한 논평에서 유상증자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지며 의심스러운 대목을 조목조목 짚었다. 포럼이 첫 번째로 던진 질문은 이것이다. “굳이 현시점에서 대규모 주주가치 희석이 불 보듯 뻔한 유상증자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화그룹은 글로벌 방위산업 시장이 팽창할 것에 대비해 국내외 투자할 자금을 선제적으로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포럼은 유상증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투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포럼의 의견은 이렇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회사채 등급은 AA-로 매우 높은 편이다. 연초 회사가 20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모집하는 수요예측에서 목표를 12배 초과하는 2조 5000억 원의 주문을 받았다. 지금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조 단위 회사채를 발행한다고 하면 흥행에 성공할 것이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을 포함해 금융권 차입도 가능하다. 증권사 추정에 따르면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향후 매년 2조 원 이상의 영업이익을 내며 상당 규모의 잉여현금흐름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4년간 3조~4조 원의 잉여현금흐름을 창출하면 유상증자는 불필요하다.”
상당히 합리적인 설명이다. 그런데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사회가 유상증자를 결의한 건 ‘답을 정해 놓고’ 회의가 열렸기 때문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회의 자체도 날림으로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럼에 따르면 사내이사인 김동관 부회장과 손재일 대표, 안병철 전략실장, 사외이사인 김현진, 전진구, 전휴재, 정도진 등 7명의 이사 중에 5명은 화상회의로 참석했다. 지난 20일 오후 3시 30분에 열린 이사회 회의는 짧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오후 5시 30분에 이사회 의안 통과를 가정한 IR 행사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3.6조 유상증자 결의에 이사회 회의 2시간 불과
이사회가 2시간밖에 안 되는 시간에 3조 6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안을 협의하고 결의까지 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포럼은 “회사가 제공한 정보가 부족하고 일반주주의 반발 등을 고려해 ‘다른 의견’을 듣겠다는 최소한 의식이 있었다면 투자은행(IB)이나 컨설턴트 같은 외부 전문가를 이사회에 초대해 의견을 청취하는 것이 이사의 책무”라고 지적했다. ‘순수한 사업상 목적을 위한’ 유상증자 의안과 관련해 자본배치는 이사의 선관주의의무 대상이기 때문이다.
포럼이 제기한 두 번째 의문은 이번 유상증자가 과연 예측 가능하고 공정하냐는 것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사회는 유상증자 결의에 앞서 지난 달 1조 3000억 원을 투입해 한화오션 지분을 인수하는 건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이 자금으로 한화그룹 총수 일가의 가족 회사인 한화에너지와 한화임팩트가 보유한 한화오션 지분 7.3%를 매입했다. 그래놓고 한 달 만에 무려 13%의 주식 희석화가 예상되는 대규모 유상증자를 강행한 것이다. 보유한 자금은 총수 일가 가족 회사의 현금 자산을 늘리는 데 사용하고 미래 투자를 위해 일반주주에게 손을 벌리는 결정이 과연 공정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포럼도 “회사 여유 자금은 지배주주 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 계열사 주식을 인수하는 데 쓰고, 신규 투자금은 일반주주에서 받고자 하니 비판이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화그룹은 지난 2023년 한화오션 인수 때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그룹을 대신해 지분을 모두 사지 않고 지배주주가 일부 지분을 보유했다가 한화오션 주가가 주당 7만~8만 원으로 급등한 시점까지 기다렸다. 당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사회는 지배주주 지분을 고가에 매수하는 건을 승인했다. 이사회의 독립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주주 피해 사례 막으려면 상법 개정안 공포해야
거버넌스포럼은 일반주주와 투자자의 적극적인 참여로 성공한 미국 항공기 제조업체 보잉의 유상증자 사례와 지배주주를 위해 일반주주에게 큰 손실을 입힌 한화에어로스페이스 경우를 비교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보잉은 미국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인 243억 달러를 유상증자를 통해 조달했다. 증자 규모가 예상보다 2배나 컸으나 발행 당일 주가는 단지 3% 하락했다. 그 후 미국 증시가 약세임에도 보잉 주가는 20% 상승했다. 포럼은 “보잉이 자금 부족에 따른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과 대규모 자본조달의 필요성을 투자자들에게 사전에 충분히 설명했다. 그 결과 기존 주주지분이 희석돼 주가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자와 주주들이 증자를 지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융감독원은 28일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에서 일반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이 핵심인 상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적절치 않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정부(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에 보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이사회의 졸속 유상증자 결의 같은 일을 막으려면 상법 개정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금감원은 이날 의견서에서 “상법 개정안이 장기간의 논의를 거쳐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런데도 재의요구를 통해 그간의 논의를 원점으로 돌리는 것은 비생산적이며 불필요한 사회적 에너지 소모 등 효율성을 저해한다”고 강조했다. 재계와 국민의힘이 빈약한 근거를 내세워 상법 개정안에 반대하고 있으나 자본시장 선진화와 시장 신뢰를 위해서는 정부가 즉시 공포해야 한다는 게 금감원 의견이다. 대다수 전문가와 시장 참여자도 여기에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