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 찬사와 비난 사이의 간격에 대한 작은 생각
1등은 아니지만 봉준호 월드로 가는 중차대한 영화
종종 많은 영화가 개봉 후 관객들에게서 좋고·나쁨이 엇갈리는 평을 듣는다. 이럴 경우 평론가들을 위시해 흔히 지식인 집단에서는 더더욱 극단적인 평가들이 오고 가는 경우가 많다. 봉준호의 신작 ‘미키17’이 지금 그런 형국이다. 대중들은 지식인층의 ‘선플’보다는 ‘악플’에 영향을 더 받는다. 호오가 크게 엇갈리는 반응이 이어지면 영화는 흥행에 일정한 타격을 받는다.
영화를 좋다 하든 나쁘다 하든, 그것은 마치 좌파, 우파 나누는 가르마 타기와 비슷한 느낌인데, 가장 위험한 것은 확신이다. 영화 ‘콘클라베’의 주인공 토마스 로렌스(랄프 파인즈)의 대사를 다시 인용하자면 확신은 포용의 적이다. 영화 ‘미키17’에 대한 일부 지식인들의 (비판이 아닌) 비난 섞인 반응들은 관용의 부족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영화에 관한 한 내가 보는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극히 자기 확신이 강한, 이것도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일종의 엘리트주의 성향으로 보인다.
‘봉테일스러움’이 없어졌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비난 중에는 다소 선을 넘는 자극적인 멘트들도 많다. ‘천재들이 할리우드로 가면 자주 바보가 된다’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봉준호는 바보가 됐다. 결과적으로 ‘미키17’은 바보 같은 영화라는 얘기이다. ‘에드워드 애슈톤의 원작의 메시지가 다 사라졌다’며, ‘잘 쓰여진 원작을 우스꽝스러운 블랙 코미디로 만들었다’는 비난은 그래도 귀여운 편이다. 물론 그 구체적 근거가 다소 지나치게 주관적이어서 동의하기는 쉽지 않지만 영화평이야 워낙 주관성에 기대어 있는 게 사실이다.
주관적 비하의 언사 중 대표적인 것은 봉테일스러움이 없어졌다는 것인데, 도대체 다들 봉테일스러움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건 어찌 보면 말 갖다 붙이기 식 비난이다. 이런 것까지 신경쓸 필요는 없는 일이지만 슬쩍 반박의 심리를 부추기는 언사이기는 하다. 봉테일스러움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그건 또 어떻게 구현되는 것일까. 장면? 미장센? 대사? 캐릭터에서일까? 불분명한 지적이다. 영어 대본이었기 때문인지 봉준호스러운 풍자가 사라졌다는 말들도 좀 조심스럽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풍자와 해학은 시대정신에 기초한다. 그렇다면 ‘미키17’은 시대정신이 부족하다는 뜻인가. 동의하기 어렵다.
'미키17'의 개봉을 전후해서, 그리고 지금까지, <민들레> 독자들에게 이 영화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은 이유는 온갖 매체에서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가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었고(라운드 테이블 인터뷰 수만 90개였다), 다소 정보가 과잉되고 있던 차에 여기서까지 그 범람에 일조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들레>가 워낙 정치시사적 성격이 강한 터라 '미키17'이 윤석열 부부–트럼프–일론 머스크에 대해 조소하고 풍자한 장면들을 얘기하는 것은 민들레 독자들을 다소 식상하게 만들 것이라고 판단한 부분도 있다. 그런데 대체 어느 부분에서, 봉준호의 풍자가 사라졌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1등짜리 지식인보다 대중이 원하는 쉬운 서사 구조 택한 천재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단 누구나 다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뭐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이 생각하는 한국의 1등인 자, 한국의 천재라는 개념은 그 스펙트럼이 너무 협소하다.. 이들에게서 1등은 반에서의 1등, 전교에서의 1등, 전국에서의 1등에 국한한다. 1~10등 사이 정도라도 1등이 된다는 식으로 개념을 확장시키지 못한다. 아니 확장시킬 생각이 없다. 그렇게 되면 엘리트의 수가 너무 많아지니까. 엘리트가 많아지면 사회가 천박해지니까, 라고 생각한다. 영화 ‘미키17’은 1등에서 10등 사이의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단연 1등까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1등은 1등이다.
그러나 봉준호를 천재라고 생각해 온 (자신도 봉준호급의 1등인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더욱 더 가혹한 천재성, 더욱 더 치열한 천재성을 요구한다. 거기에 부합하지 않으면 썸즈 업(thumbs up) 대신 썸즈 다운(thumbs down)을 택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존재와 대상이 아니다. 대중이 즐기는 것이며 쉬운 언어로 대중의 마음속을 횡단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미키17’에 퍼붓는 지식인 사회의 ‘비판’ 아닌 ‘비난’은 이번 영화가 봉준호의 영화 중 가장 쉬운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영화가 어려우면 대중들이 좋아 하지 않는다. 영화가 쉬우면 지식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는 어느 쪽에 서게 될까. 그건 결국 불문가지의 얘기이다.
봉준호 월드의 완성으로 가는 봉준호의 중차대한 계획
‘미키17’을 보고 있으면 봉준호가 ‘다 계획이 있었음’을, 자신의 영화 ‘기생충’에 그 대사를 넣은 것도 다 계획이 있었던 것임을 알게 해 준다. 봉준호는 2000년 ‘플란더스의 개’로 데뷔한 이후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마더’(2009) 등의 전반기와 ‘설국열차‘)2013) ‘옥자’(2017)’ ‘기생충’(2019)에 해당하는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안과 밖, 사물의 구체와 인식의 추상을, 한국적 특수한 이야기와 세계 자본주의의 보편적 질서와 무질서를 아우르며 온 셈이다. 그 아우라의 총합, 구체와 추상, 특수와 보편이 변증법적으로 결합한 영화가 바로 이번 ‘미키17’이다. 봉준호는 다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월드, 이른바 봉준호 월드를 완성한 셈이다. 봉준호는 결국 신자유주의의 종착지 그 디스토피아를 경계한다. 그 얘기를 하기 위해 지난 20여 년을 묵묵히 걸어 온 셈이다. ‘미키17’의 의미는 그만큼 중차대한 측면이 있다.
‘미키17’의 핵심은 원작인 ‘미키7’이 영화에서는 미키17이 됐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서 봉준호는 미키를 10번 더 죽이는데 그건 미키가 익스펜더블(소모품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키가 살아가는 근미래에는 인간의 유전자와 기억을 저장해 놓고 3D 프린터로 몇 번이나 재생시킬 수 있다. 이런 설정에는 두 가지의 큰 개념, 철학적 판단이 개입돼야 하는데, 첫 번째로 미키1과 미키2는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의 문제이다. 미키는 7이 됐든 17이 됐든 본질은 바뀌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재생 과정에서 인간의 본질은 바뀌게 되는 것인가. 결국 우주시대의 가장 큰 철학적 난제는 이렇게 자기 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미키를 10번 더 죽이는 봉준호의 계획은 우주시대 세계혁명
두 번째로 왜 10번을 더 죽였는가이다. 이 10번 동안 봉준호는 그 ‘우주적 살해’에 어떤 의미를 그려내려 했느냐이다. 그건 바로 ‘노동 착취’의 이슈이다. 미키라는 우주 시대의 익스펜더블은 대놓고 착취당한다. 목숨을 걸게 하는 생체실험과 온갖 3D 노동에 내몰리지만 정당한 임금과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다. (우주선의 독재자 마샬은 이들에게 섹스도 금지시킨다.) 우주시대가 됐든 어쨌든 미키는 힘없는 노동자이고 희망없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이다. 시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바뀐다 한들, 인간의 노동조건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이 봉준호이다. 봉준호의 계획은 결국 우주시대에 이루어야 할 세계혁명에 있다.
‘미키17’은 지구에서 실패한 인간들이 새로운 행성에서 여성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여주인공 나샤가 권력을 갖게 된다) 외계 생물인 크리퍼와 공생하게 됨으로써 인권의 영역을 동물권을 넘어 대폭 확장시킨다. 지구에서는 실패했지만 외계 행성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봉준호의 머릿속에는 지구의 멸망과 새로운 유토피아 건설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정부주의적인 사고이며 그렇게 봤을 때 ‘미키17’을 두고 봉준호의 날카로움이 사라졌다는 지적은 어울리지 않는다.
‘미키17’은 세계 영화계의 위대한 성과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할리우드에 변화를 몰고 올 기폭제 역할을 해낼 작품이다. 1억 2천만 달러짜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치고 ‘미키17’만큼 내추럴하고, 인간적이며, 따뜻한 영화는 없다. 인공미 가득한 다른 SF영화 ‘듄’ 시리즈와 비교할 때 ‘미키17’은 확실히 다른 지점에 서 있는 영화이다. 그러니 정도껏 하는 게 좋다. ‘미키17’에 대해 적당히 열광하고 적당히 폄하하는, 영화 보기의 밸런스가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전 사회적으로 그러한 균형의 시선이 필요한 시기이다. ‘미키17’부터 밸런스 잡기를 시작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