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부른 화해 용서 발설자가 배신자… 윤정모 '가시그물'
토착왜구가 이 땅에 남겨놓은 삶의 질곡
누가 화해와 용서를 말할 자격이 있을까
영화사의 고전이 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3부작 <대부>시리즈에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관통하는 대사들이 산재한다. 경쟁 조직과 대결하다 장남을 잃은 마피아 패밀리의 우두머리 비토 콜리오네가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 마이클에게 건넨 “화해를 주선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그가 바로 배신자다”라는 대사도 그중 하나이다.
비토의 장례식에서 이 말을 기억한 마이클은 자신에게 화해를 권유하는 배신자인 아버지의 친구와 경쟁 조직에 대해 잔혹한 복수를 실행한다. 주인공이 입은 피해의 서사에 함께 분노하며 인내해온 관객에게 보상처럼 다가오는 이 장면은 적대 세력 사이에 갈등을 해소하고 상생을 도모하기 위한 화해의 순기능을 부정하고 마지막까지 상대와 싸워야 한다는 극단적 주전론을 설파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단순한 폭력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는 갈등의 요인들이 본질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화해가 성립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권력과 이권이 결부된 세계에서 화해의 이면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식민, 분단, 민주화운동 등 한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에 연루되어 수난을 겪은 개인의 서사에 꾸준히 천착해온 윤정모의 최근작 <가시그물>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후기에서 윤정모는 “친일과 일제가 준동하는 요즘, 여러분의 심기는 어떠신지요?”라고 묻는다. 지금은 구치소에서 파면 선고를 기다리는 내란 우두머리 윤석열이 집권기간 내내 화해와 용서를 말하며 자행한 이른바 굴종외교와 그에 수반하여 독립기념관장 등 각계에서 친일적 인사들이 준동하는 것에 대한 분노임이 분명한 이 질문은 이 소설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쓰여졌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전한다.
소설은 조직의 두목이 저지른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무기수로 복역중이던 전동규가 20년 만에 모범수로 출소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동규는 아버지인 전기봉의 심한 폭력으로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하고 조직 세계로 들어선다. 폭력의 원인은 전기봉과 혼외관계를 가진 송다연이 본처를 살해한 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다연에 대한 동규의 원한과 복수심도 이에 기인한다.
감옥을 나선 동규는 복역 중에 다연의 부탁으로 자신을 후원하던 해인사의 선원장을 찾아간다. 다연의 예기 시절 후배였던 선원장은 동규에게 다연이 이미 죽었으며 다연이 동규에게 남긴 재산을 수령하기 위해서는 동규가 알지 못하는 다연의 삶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전한다. 원수의 삶이 어떤 것인지 관심이 없었던 동규이지만 자신의 원한의 대가인 돈을 받기 위해서 조사를 시작한다.
이후 소설은 동규와 다연의 관점에서 두 사람의 사연이 교차된다. 동규는 어머니의 살해범이자 윤락업소에 여성을 소개하며 먹고 사는 천박한 거간꾼으로만 알던 다연이 사실은 동래학춤의 계승자이며 훌륭한 예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동규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예인으로서 다연의 삶이 망가지게 된 원인은 전기봉의 성폭행이었으며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바로 동규라는 것과 본처의 학대에 시달리던 동규를 구하려다 다연이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소설은 동규와 다연이 질곡의 삶을 살게된 것은 바로 전기봉이라는 한 인물이 벌인 범죄의 후과인 것을 밝힌다.
이처럼 누군가에 대한 가해와 피해의 양상은 당장의 순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을 지나 미래를 거쳐 어쩌면 마지막까지 누군가의 삶을 구속하기도 한다.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다연의 삶을 이해한 동규가 “용서는 간단하지가 않다”고 독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소설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전기봉이 바로 일제시기에 수탈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잔류 일본인의 후손이었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소설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는 분명히 하나의 알레고리다. 전기봉과 송다연, 그리고 전동규의 서사는 단순히 개인적 불행의 서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그로 인해 회복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한국의 서사와 동형관계를 가진다. 누군가는 가해와 피해의 순간이 이미 종료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에서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동규가 다연의 삶을 추적하다 발견한 소설 속 소설 <동래성 순절도>가 소설의 말미에 상당한 분량으로 기술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윤정모는 치밀한 조사를 거쳐 동래성 전투의 참상을 섬세하게 복원한다. 임진왜란 시기에 벌어진 동래성 전투는 중요한 전투이지만 패전의 기록이다보니 교과서에서 한 줄의 역사로 지나가는 사건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요 지휘관을 제외하고 전투의 실상을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투에 참여하고 희생된 자들의 실재가 부존하는 것은 아니다. 윤정모는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투쟁에 함께 했지만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소설가가 의도하는 것은 다연과 동규를 포함하여 화해의 대상으로서 한번도 주요한 주체가 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것이다. 소설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역사의 가시그물로부터 상처 입은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이제 윤정모가 생각하는 화해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화해는 가해자가 피해자에 행하는 모든 폭력적인 것이 종식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 종식여부의 판단은 언제나 피해자의 결정에 있다. 화해는 가해자의 사과와 피해자의 수락이라는 균등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불균등한 역학관계에서 시작된 가해와 피해의 양상을 본래의 관계로 복원하는 것이 바로 화해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화해는 가해자가 희생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반성이 이루어질 때. 그리고 그들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이 기울여질 때만이 가능하다. 그것이 선재되지 않은 화해는 화해의 이름을 빌린 또 다른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윤정모의 <가시그물>은 임진왜란의 동래성 전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강요하는 사건들에 훼손되어 온 삶들을 말한다. 인물들은 시공간을 넘어 서로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으며 그들의 슬픔과 고통은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한다. 누군가 살아 남은 사람들의 이해를 위해 섣부른 용서와 화해를 말할 때 소설가는 아직 마르지 않은 그들의 눈물을 먼저 살핀다. 그는 역사의 물음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바로 소설가로서 윤정모의 필생의 숙명이다.
* 출판사 교유서가에서 펴냈습니다. 3월14일(금) 오후 7시30분부터 서울 은평구 이호철북콘서트홀에서 윤정모 작가를 모시고 북콘서트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