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여 년간 고려인 시름 달래온 고려극장 이야기
1932년 9월 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서 창립
1937년 스탈린 강제이주 때 중앙아시아로 옮겨
해외 한민족 공연예술단체 중 가장 오랜 역사
이념 선전 도구 벗어나 민족 정체성 수호에 앞장
한국이민사박물관 고려인 이주 160주년 특별전
1864년 9월 21일 러시아 남우수리스크 포시예트지구 노브고로드 경비대장 레자노프는 관할 지역 사령관인 해군 소장 카자케비치에게 “함경도 무산 출신 최운보와 경흥 출신 양응범이 이끄는 조선인 14가구 65명이 올해 1월 이주해 프리모리예(연해주) 포시예트의 지신허(地新墟·치진헤) 마을을 개척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것이 한민족이 해외로 집단 이주한 최초의 기록이다. 미국 하와이 농업이민보다 39년 앞선 해외 개척사의 서막이자 근현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시작이다. 러시아인은 조선인을 ‘코리아인’이란 뜻으로 ‘카레이츠’ 혹은 ‘카레이스키’라고 불렀다. 이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고려인이다. 고려인의 러시아 연해주 이주 역사는 올해로 160주년을 맞았다.
1930년대 연해주에 고려인 20만여 명 거주
1860년 러시아와 중국(청나라) 간의 북경조약에 따라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연해주에는 비워둔 땅이 많았다. 고려인들은 이곳의 황무지를 갈아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러시아인들은 고려인의 뛰어난 농사 기술과 근면성을 높이 사 농경지 개발을 장려했다. 이 소식을 듣고 수탈과 착취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는 고려인이 갈수록 늘어났다. 1869년에는 함경도 홍수로 기사흉년이 발생해 농민 6500여 명이 대거 이주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해서는 국권을 되찾으려는 우국지사가 몰려들어 연해주는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이 됐다. 이범윤·이상설·이동휘·이동녕·신채호·박은식·최재형·홍범도·안중근 등이 독립군을 조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무장독립투쟁의 열기는 식어갔지만 이주 행렬은 끊이지 않아 연해주 한인촌들은 활기를 띠었다. 1930년대 초에는 고려인이 20만 명을 넘었다. 곳곳에 고려인 학교가 세워지고 한글 신문과 잡지가 발간되는가 하면 우리말 공연단체들이 꾸려졌다. 1920년대 말부터 신한촌구락부 연예부, 김니콜라이연주단 등 아마추어 예술집단이 활발하게 활동했고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노동자청년극장이 설립됐다. 이를 토대로 1932년 9월 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 고려극장 전신인 원동변강(遠東邊疆)조선극장이 출범했다. 해외 한인 공연예술단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당시 소련 당국은 러시아어를 못 알아듣는 고려인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이들을 국책 사업에 동원할 목적으로 고려극장 설립을 지원했다. 무대는 사회주의 혁명 정신을 기리거나 집단농장의 작물 증산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꾸며졌고, 노래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한민족 고유의 정서를 이어감으로써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토끼전 등 우리나라 고대 소설을 연극으로 꾸미는가 하면 전통 민요 가락을 접목해 노래를 지었다.
고려극장 수위로 일한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고려극장은 창립 5년 만에 큰 시련을 맞았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의 특별명령에 따라 1937년 9월부터 12월까지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 17만 명이 중앙아시아로 모두 강제이주 당한 것이다. 소련 정부는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고려인 지도자급 인사 2500여 명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했다.
아무런 위생시설도 없고 방한 장치도 갖춰지지 않은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6500km를 이동하는 도중 추위와 굶주림으로 1만여 명이 숨졌다. 특히 젖먹이와 갓난아이들의 희생이 컸다. 고려인 가운데 1935~1938년생이 드문 것은 이 때문이다.
고려극장 단원도 대부분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옮겨갔고 일부는 우즈베키스탄 호레즘으로 재이주했다. 고려극장도 둘로 나뉘었다가 1939년 우즈베크 수도 타슈켄트에도 추가로 생겨 3개로 늘어났다. 크질오르다 고려극장은 1942년 우슈토베로 이전한 뒤 1950년 호레즘과 타슈켄트 고려극장을 흡수 통합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중앙아시아로 끌려와 크질오르다 고려극장 수위로 일하며 만년을 보냈다. 홍범도는 고려극장 배우 이함덕에게 자신의 일대기를 구술해 ‘홍범도일지’를 완성했다. 이함덕의 남편인 극작가 태장춘은 이를 토대로 연극 ‘홍범도’를 무대에 올렸다. 홍범도는 연극을 관람한 뒤 자신을 너무 추켜세웠다며 쑥스러워했다고 한다. 고려극장이 우슈토베로 이전하자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관객들이 던져준 꽃다발이 무릎까지 쌓였다”
고려극장은 1959년 예전 자리로 옮겨가 크질오르다 주립이 됐다가 1966년 당시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로 이전하며 1968년 국립으로 승격됐다. 순회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아리랑가무단도 이때 창설됐다. 1960년대 타슈켄트 예술대와 알마티 연극예술대 졸업생이 대거 입단해 고려극장은 활기를 띠었고 전성기가 80년대 초까지 이어졌다.
중앙아시아 각지의 콜호스(집단농장)에서 일하던 고려인들은 고려극장 순회공연단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날은 고려인들에게 명절이고 잔칫날이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전에는 고려인들이 거주지를 떠날 수 없었던 탓에 동향 사람 소식과 친지의 안부를 듣는 통로이기도 했다.
고려극장 가수였던 방타마라 씨는 2017년 5월 자신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고려아리랑: 천산의 디바’(연출 김소영) 국내 개봉을 앞두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무대에서 노래를 마치면 관객들이 던져준 꽃다발이 무릎까지 쌓일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회고했다.
러시아인을 비롯한 다른 민족들도 고려극장 단원들의 연기와 춤과 노래에 열광했다. 고려인을 그저 농사 잘 짓는 민족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에게 고려극장 무대는 충격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서야 소비에트연방에 소속된 국가 가운데 고려공화국이 없는데도 고려극장이 있는 까닭을 알게 됐다고 한다.
고려극장의 첫 작품 ‘춘향전’의 초대 타이틀롤을 맡은 이함덕은 20여 년 동안 춘향으로 활약해 관객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톱스타 중의 톱스타였다. 100가지가 넘는 배역을 소화하며 고려인 최초로 카자흐스탄 인민배우에 뽑히는 영예도 누렸다.
창단 57년 만에 1989년 고국 첫 나들이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고려극장 레퍼토리에서 민족적 색채는 점차 엷어졌다. 한국어를 못하는 가수와 배우가 늘어나고, 한국어를 알아듣는 관객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연극이 중심이었다가 무용과 음악의 비중이 점점 커졌다.
고려극장의 존재가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1980년대 말의 일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가 대거 참가한 것을 계기로 한국과 공산국 간에 문화 교류의 물꼬가 트이자 이듬해 고려극장 아리랑가무단도 창단 57년 만에 고국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1989년 9월 열린 해외동포예술단 초청공연에서 타슈켄트 폴리트오젤극장의 청춘가무단, 타슈켄트 록그룹 고려 등과 함께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이 독립하고 나서는 힘겹게 자리잡은 고려인들이 다시 어려움에 빠졌다. CIS(독립국가연합) 각국에 민족주의가 대두하며 자국어가 공용어로 채택되다 보니 러시아어밖에 모르던 고려인들이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거나 공직 진출이 제한된 것이다.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지역이나 한국으로 재이주하는 고려인이 늘어났다.
고려극장도 나라의 지원이 끊기는 바람에 운영난에 빠졌으나 1992년 알마티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면서 다소 숨통이 트였다. 한국 정부와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 등의 후원이 이어졌고, 우리나라 국립극단과도 자매결연해 단원들이 모국 초청교육을 받기도 했다.
현재 고려극장 단원은 90여 명으로 연극단, 성악단, 무용단, 사물놀이팀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연극은 300편가량 무대에 올렸는데, 한국어 대사를 구사하고 러시아어로 동시통역하는 원칙을 지켜오고 있다. 고려극장은 알마티 외곽에 있다가 2018년 5월 카자흐스탄 국립관현악단이 사용하던 도심 지역 2층 건물을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제공받아 옮겼다.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
고려인 이주 160주년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는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지난 8월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류가헌갤러리가 양병만 사진전 ‘고려극장, 100년의 일기’를 개최한 데 이어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의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광주광역시의 월곡고려인문화관 ‘결’, 고려인 지원 시민단체 ‘너머’와 함께 지난 10월 15일부터 내년 2월 23일까지 ‘빛나라 고려극장’이란 이름으로 고려인 이주 160주년 기념 특별전을 마련한다.
고려극장의 우리말 연극 대본, 극작가들의 육필 원고, 홍보 전단지, 연극 전문잡지 ‘극장’, 공연의 희귀 영상, 각종 사진 자료 등을 선보이고 있으며 고려극장 주임미술가 문빅토르가 2022년 유해 모국 송환을 기념해 그린 홍범도 장군 초상화도 만날 수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같은 기간 바로 옆 전시실에서 고려인 이주사를 더듬어보는 두 번째 특별전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조국을 찾았다’도 열고 있다. 당시 사진과 영상, 신문, 농기구, 생활용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특별전 제목은 우즈베크의 노동 영웅 김병화가 남긴 말이다.
고려인 이주 160년사는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 고려인들은 두 번씩이나 실향과 이산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았고, 모국과 단절된 채 오랜 세월을 보내느라 한국어를 잊어버렸음에도 기적처럼 고려극장의 명맥을 이어왔다. 이제는 모국의 형제 자매들이 고려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고려극장의 빛나는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