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외풍에 정부 속수무책…외통수 걸린 한국 경제
원/달러 환율 치솟아 금리 인하 힘들어
정부·여당은 추경 통한 경기 부양 외면
성장률 전망치 속속 하향…저성장 고착
경제 불확실성 커져 기업들도 좌불안석
내수 살리지 못하면 건전재정도 공염불
원/달러 환율이 26일 또 출렁거렸다. 전날 도널드 트럼프가 내년 1월 20일 미국 대통령 취임 첫날 미국의 3대 수입국인 중국과 멕시코, 캐나다 제품에 대해 추가 관세를 물리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겠다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린 여파로 주요국 통화 대비 달러 가격이 급등락했다. 트럼프 재집권 후 관세 전쟁이 본격화하면 환율 변동성은 더 커질 것이다. 한국도 달러당 1400원이 넘는 고환율 시대가 올 수 있다.
트럼프 “취임 첫날 추가 관세 부과 행정명령”
달러 가격이 급등하면 기준금리 인하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경제에 부담을 준다. 고환율 영향은 이미 감지되고 있다. 28일 예정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해진 것이다. 한 달 전만 해도 금리가 인하될 것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환율 급등에 금리 인하가 늦어지면 그렇지 않아도 꽁꽁 얼어붙은 내수 경기를 살리기 힘들어진다. 이럴 때 정부가 재정을 적극적으로 풀어 경기 부양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건전재정 타령만 하며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 경제는 트럼프가 촉발한 관세 전쟁으로 수출 회복이 지연되고 내수 침체가 장기화하는 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외통수’에 걸려든 모양새다. 그 결과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다. 내년 성장률이 잠재 성장률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도 쏟아진다. 경제 성장률이 잠재 성장률을 밑돈다는 건 저성장 고착을 의미한다.
채권 전문가 10명 중 8명 “기준금리 동결”
트럼프가 취임 당일 중국에 대해서는 추가 관세에 더해 10%의 관세를 더 부과하고, 멕시코와 캐나다에는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26일 외환시장은 요동쳤다. 중국과 캐나다, 멕시코는 미국의 3대 교역국이다. 미국이 이들 국가가 무역 전쟁을 벌인다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직격탄을 맞는다. 세계 교역량이 급격히 줄 것이기 때문이다.
관세 전쟁으로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면 달러 가격이 치솟는다. 금융투자협회는 26일 ‘12월 채권시장 지표’를 공개하며 채권 전문가 10명 중 8명 이상이 한국은행이 금리를 동결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밝혔다. 달러 강세로 환율이 상승하면 물가를 자극하고 국내에서 자금이 빠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금리를 동결할 것이라는 의견을 낸 한 전문가 비율이 83%로 한 달 전의 36%인 것과 비교해 대폭 상승했다. 채권 금리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도 64%가 ‘보합’을 점쳤다. 다음 달 물가가 상승할 것으로 내다본 응답자도 한 달 전 8%에서 30%로 4배가량 늘었다. 고환율이 국내 물가를 밀어 올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것이다.
골드만삭스 “내년 성장률 1.8% 그칠 듯”
한국 경제에 대한 전망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26일 ‘2025년 한국 거시 경제전망’ 간담회에서 내년 성장률이 1.8%에 그칠 것으로 봤다. 골드만삭스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수출 약화가 올해 하반기 시작됐고 이에 따라 투자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정책이 한국 경제의 하방 리스크가 될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내외 기관들도 올해와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속속 내리고 있다. 올해 전망치는 2% 중반에서 2%대 초반으로, 내년 전망치는 2.0%로 하향 조정한 곳이 많다. 그러나 이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산출한 전망치다. 관세 전쟁이 현실화하면 세계 교역량이 감소하며 각국의 경제 성장률을 더 끌어내릴 수도 있다.
이런 대외 불안 요인을 반영해 한국은행도 28일 수정 경제전망을 발표하며 성장률을 내릴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올해는 2.4%에서 2.2%로, 내년은 2.1%에서 2.0%로 전망치를 하향 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 성장률을 1%대로 낮출 것이라는 소수 의견도 나온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달 29일 국정감사에서 성장률 전망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윤석열 정부 저성장 고착 위기에도 무대책
한국 경제가 벼랑에 몰렸는데도 정부는 속수무책이다. 내수 경기 활성화를 위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에도 반대하고 있다. 최근 대통령실에서 추경 가능성을 거론했다가 정부와 여당이 반발하며 없었던 일이 됐다.
세수가 부족한 상태에서 추경을 편성하려면 어쩔 수 없이 적자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추경 반대론자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국가 부채가 급증한 상황에서 또 적자국채를 발행하면 재정 건전성이 나빠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년도 국채 발행이 역대급인 221조 원에 달하는 데다 국채 물량이 늘어나면 금리가 상승할 수 있다는 점도 추경을 반대하는 근거로 꼽는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시급하다. 정부 재정을 풀어 장기간 지속된 고물가와 고금리로 얼어붙은 내수 경기부터 살려야 한다. 일본 정부도 최근 내수 활성화를 위해 123조 원가량의 추경을 편성하기로 했다. 대외 환경이 불확실할 때 내수가 버텨 줘야 성장률 추락을 방어할 수 있다.
건전재정만 고집하다 한국 경제 침몰할 수도
윤석열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민간 주도 경제 성장을 외치고 있으나 기업들도 좌불안석이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지난 7~18일 회원사 237곳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26일 공개했다. 응답자의 76.4%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한다는 게 요지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화로 인한 기업 부담 증가(43.9%)와 고강도 관세정책에 따른 무역수지 악화(35.9%), 대중국 통제 강화에 따른 중국 위험도 증가(13.3%) 등을 기업들은 우려했다.
외풍이 거세질수록 내수 경기를 살리는 게 시급하다. 지금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때만큼이나 힘든 시기를 앞두고 있다. 이럴 때는 정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자력으로 대외 여건을 바꿀 수는 없으나 내수 경기를 살리기 위한 긴급 대책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정부와 여당은 내수 진작에 투입할 추경 편성에 반대만 할 때가 아니다. 지금 경기를 살리지 못하면 세수가 더 줄어 건전재정도 공염불로 끝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