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6년…"일본제철 매각 시행, 제3자 변제 멈춰라"

"강제동원 피해자가 6년이나 기다리고 있다"

강제동원 배상 판결에도 재산매각 명령 보류

"대법원이 스스로 법치주의를 허물어 버린 것"

"정치적 판단으로 매각명령 시간을 끌고 있다"

피해자 가족과 함께 '항의서한' 대법원에 제출

"피해자 인지 어려울 때 제3자 변제 동의하기도" 

2024-10-30     김민주 기자
30일 '강제동원 대법원판결 6년 강제집행 최종 판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의 아들 이창환 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2024.10.30.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제공

104세 아버지를 둔 아들의 머리는 백발이 성성하다. 그의 아버지는 80년 전 일본으로 끌려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로, 아들인 창환 씨는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대법원 앞에 섰다. 기자가 '할아버지 건강은 어떠시냐'고 묻자, 창환 씨의 얼굴에는 슬픔이 드리웠다.

"104세의 연세에 함께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요즘은 환각, 환청 증상인 섬망증이 오셨어요. 그런데 계속 뭐라고 외치시는데,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거든요. 자세히 들어보니 '대한민국 만세'였어요. 팔도 잘 올라가지 않으신데 그렇게 팔을 올리면서 외치세요. 이젠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올해를 넘기기 힘든 상황이죠. 아버지가 그동안 고생하시고 재판까지 하셨는데, 자식으로서 그 의지를 끝까지 이어가려고요.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고 (국민이 피해를 입었으면)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도 상황이 되는 한 계속 활동할 생각입니다."

"피해자는 사과와 배상을 원한다"

30일 오후 2시 일본제철을 상대로 한 강제 동원 손해배상청구소송 1심 선고가 승소했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민사37단독 김민정 판사는 9명의 피해자에게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들에게 1억 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하지만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는 일본 전범 기업이 아닌 민간 기부금 형식의 지원금으로 피해자 배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인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하 재단)의 경제적인  상황으로 이뤄질지 미지수며, 6년 전 있었던 강제 동원 배상 판결 배상 역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 가족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등 시민사회단체는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며, 재판이 열리기 전인 오전 10시 서울시 서초구 대법원 후문에서 '강제동원 대법원판결 6년 강제집행 최종 판결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는 2018년 대법원의 강제 동원 배상 판결과 관련해 일본제철이 보유한 피엔알(PNR) 주식 등 일본 피고 기업의 국내 자산에 대한 특별 현금화 명령 상고심 사건 최종 판결이 계류된 것과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 방침을 세운 데 대해 강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첫 발언을 한 박석운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공동대표는 최종 판결이 계류된 것에 대해 "대한민국 최고 법원이라는 대법원이 법치주의를 스스로 허물었다"며 "일본의 압박과 윤석열 정부의 요청 때문이다. 대법원은 법치주의를 앞세워 판결을 이행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제2의 사법농단"이라고 비판했다.

일본제철 사건 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도 판결이 6년이나 지연되는 것 자체가 유례없는 일이라고 했다. 임 변호사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사건에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으로 대응하는 것"이라며 "고령의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 정도면 윤석열 정부도 이해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 할아버지가 많이 아프시다"고 말했다.

그는 "사법부가 매각명령을 결정하지 않고 피고인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또 다른 판결이 이뤄지고 있다"며 "새로운 강제 동원 사건이 계속 선고되고 있는데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내용에는 일본의 재원 확보와 사과 내용이 없다. 승소한 피해자 중 제3자 변제를 원하는 분도 있는데 제3자 변제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뿐"이라고 했다.

 

30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은 대법원 후문에서 '강제동원 대법원판결 6년 강제집행 최종 판결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4.10.30.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제공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이춘식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사과와 배상뿐이라고 했다.

김 실장은 "강제 동원 피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는 지금 104세"라며 "할아버지는 80년 전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제철에서 공습 피해를 겪고 그곳에서 영장이 나와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말했다. 이어 "할아버지는 해방이 된 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며 "일본제철의 가마이시 제철소까지 1000㎞를 걸어갔다. 목숨을 걸고 일했지만 돈을 받지 못한 것이다. 빼앗긴 인권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찾아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시민들이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이춘식 할아버지를 위해 모금까지 했다"면서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일본제철이 사과하고 배상하는 것뿐이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 동안 판결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피해자 가족과 시민사회는 항의서한을 통해 재차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들은 "2018년 10월 30일 일본제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승소한 대법원 판결은 식민주의 극복이라는 세계사적인 흐름을 반영한 역사적 판결"이라며 "이런 판결에도 일본 정부는 사죄는커녕 국제법 위반이라고 한국의 사법 주권을 무시했다. 윤석열 정부는 사법 주권을 포기하고, 삼권분립을 부정하는 위헌적인 제3자 변제안으로 피해자들의 인권을 짓밟고 판결의 무력화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이어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와 피고 전범 기업, 한국 정부를 강력히 규탄한다"며 "이춘식 할아버지는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거부하는 의사를 명백히 밝혔다. 104세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인권과 존엄의 회복을 위해 지금도 병상에서 싸우고 계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은 왜 피해자의 권리 실현을 주저하고 있는가"라고 꾸짖으며 "피해자의 인권보다 윤석열 정부의 의도가 중요한가. 대법원은 하루빨리 일본제철 매각명령을 선고하라"고 촉구했다. 발표를 끝낸 뒤,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임재성 변호사, 아들 창환 씨는 항의서한을 대법원에 직접 제출했다.

아버지가 제3자 변제 동의? 불가능해

그러나 이날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가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을 촉구하고 법원에서도 일부 승소 판결이 내려질 쯤, 재단은 이춘식 할아버지가 제3자 변제 방식의 피해 배상 방법을 수용해 재단으로부터 대법원의 징용 피해 손해배상 승소 판결에 따른 배상금과 지연 이자를 수령했다고 발표했다. 아들 창환 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30일 '강제동원 대법원판결 6년 강제집행 최종 판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발언을 하고 있다. 2024.10.30.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제공

이에 창환 씨는 "아버지는 현재 정상적인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며 "아버지가 스스로 콧줄을 뺄까 봐 활동까지 제약을 한 상태인데 아들로서 납득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형제 중 일부가 최근 재단과 접촉해 제3자 변제 수령 여부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왜, 어떻게 발생한 것인지 확인할 것이다. 현재 형제 중 일부와 연락이 닿지 않고 있다. 제3자 변제 수용을 취소할 수 있는지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 방침으로 인해 피해자 가족들마저 '갈라치기'를 당한 셈이다. 이춘식 할아버지뿐 아니다. 최근 일본 강제징용 피해의 상징이었던 양금덕 할머니조차도 제3자 변제를 승인했다. 피해자 단체와 시민단체들은 정부가 위법적인 수단을 통해 제3자 변제를 추진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기자회견을 끝으로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임재성 변호사, 이창환 씨는 항의서한을 대법원에 제출했다. 2024.10.30. 김민주 기자

이날도 이춘식 할아버지가 제3자 변제를 수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 민족문제연구소,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은 성명을 내고 강력 반발했다.

이들 단체는 "이춘식 할아버지는 제3자 변제에 동의한 적 없다"면서 "이번 과정을 통해 정부가 제3자 변제가 생존자들에게 어떠한 탈법적 행위를 하고 있는지 실체가 드러났다. 앞서 양금덕 할머니도 제3자 변제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할머니의 뜻과 달랐다"고 지적했다.

이어 "양금덕 할머니도 이미 치매 판정을 받았고 정상적 인지가 어려운 상태였다. 할머니의 의지가 아니었다"면서 "생존 당사자의 법률적 행사는 오직 당사자와 이 사건의 법률 대리인만 할 수 있다. 정부가 현재 고령의 생존 피해자들이 정상적 인지능력이 없는 상태인데 이를 이용해 법률 대리인을 제치고 위법적 수단을 통해 무리하게 제3자 변제를 추진한 것"이라고 규탄했다.

이들은 "윤석열 정부는 일본 전범 기업의 배상 책임에 면죄부를 줬고 헌법을 파괴하면서까지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며 "역사적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정부는 위법적 방식에 의한 제3자 변제 판결금 강행을 당장 멈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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