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악연 끊고 동족의식 털었다" 김정은 폭주 왜?

경의선·동해선 폭파 이면엔 오랜 '희망고문'

남한 정권 향배 따라 남북 화해·협력 오락가락

문 정권도 미국 의식해 '개성공단 재개' 식언

북 주민 대남 적대감 희석 내부 단속 필요성?

2024-10-18     이유 에디터

"세기를 이어 끈질기게 이어져 온 서울과의 악연을 잘라버리고 부질없는 동족 의식과 통일이라는 비현실적인 인식을 깨끗이 털어버린 것이다."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남북의 혈맥인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도로를 폭파한 이유에 대해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단순한 물리적 폐쇄"만을 뜻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17일 인민군 제2군단 지휘부를 찾은 자리에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7일 인민군 제2군단 지휘부를 방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8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지휘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나라를 적국, 타국이라 부르며 "한국이 주권을 침해하면 물리력을 조건에 구애됨 없이, 거침없이 사용하겠다"고 위협했다. 2024.10.18 연합뉴스

김정은 "끈질긴 서울과의 악연 잘랐다"

"동족 의식과 통일은 비현실적" 주장

'서울과의 악연'은 6·25 전쟁과 두 차례의 연평해전(1999, 2022)과 대청해전(2009), 연평도 포격(2010) 등 남북 간 무력 충돌과 군사 대치의 역사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동족 의식과 통일이라는 비현실적인 인식'이란 대목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남북은 동족(한 민족)이란 절대 명제 위에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통해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조국 통일 3대 원칙'을 선포하고, 1991년 12월엔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남북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한 이후 30여 년 교류·협력의 역사를 이어왔다.

북핵 문제로 인한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모두 5차례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2002년 말 유엔사와 미군의 '훼방'에도 경의선·동해선 도로 연결에 성공하면서 그 길로 개성공단 사업과 금강산 관광,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지는 등 많은 화해·협력의 성과가 있었다.

 

북한 평양시 낙랑구역에 있는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에서 군악대가 2013년 7월 27일 전승절(정전협정기념일) 6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국제평화대행진을 선도하고 있다. 2013.7.27. AP 연합뉴스 

수구 정권 때마다 미국 전략적 이해 따라

남북 화해·협력 성과와 약속 다시 물거품

그러나 남한이 대북 강경 정책을 펴는 수구·보수 정권으로 바뀔 때마다, 그리고 한국에 절대적 영향력을 지닌 미국이 자국의 전략적 이해 변화에 따라 남북관계 진전에 부정적일 때면 민주·개혁 정부와 함께 만들어낸 성과와 약속이 곧바로 물거품이 되는 상황을 북한이 겪어온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야 김정은이 말하는 '동족 의식과 통일이라는 비현실적인 인식'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먼저 '동족 의식의 비현실성'이다. 여기서 김정은은 '자유(흡수) 통일'을 내걸고 미국, 일본과 함께 군사적으로 시종일관 대북 압박 정책을 밀어붙이는 한국의 윤석열 정권을 더는 '동족'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이날 그는 "우리가 이미 천명한 대로 만일이라는 전제조건하에서 우리의 공격력이 사용된다면 그것은 동족이 아닌 적국을 향한 합법적인 보복 행동으로 된다"라고 주장했다. 남한 주민을 '동족'이라면서 핵무기 등 무력의 사용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서다. 그래서 한국을 '동족'이 아닌 '적국'이라고 강변하는 데에 이른다.

 

30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나오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2019 06. 30. 연합뉴스

문재인 "우리 민족 운명 우리 스스로 결정"

미국 의식해 개성공단 재개 약속 못 지켜

김정은에게 '동족 의식'은 체제 유지에 위협이 된 측면도 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간 정상회담이 △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4월 27일) △ 판문점 북측 통일각(5월 26일) △ 평양(9월 18~20일) 등 모두 세 차례 열렸다. 특히 당시 문 정부는문재인-김정은의 9·19 평양 공동선언을 통해 개성공단 재개를 약속했다.

9월 19일 밤 문 대통령은 능라도 5·1 체조경기장에서 평양 주민 상대 연설에서 "우리 민족은 우수하다. 우리 민족은 강인하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한다.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한 뒤 "우리 두 정상은...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했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개성공단 재개 약속은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눈치를 보며 끝내 이행하지 못했다. 북한이 크게 실망했음은 물론이다. 그 후 북한은 2020년 6월 북한은 공동연락사무소와 개성공단 종합지원센터 건물을 폭파했다. 북한은 말로만 하고 실제론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남한의 민주·개혁 진영을 보면서 '서울'을 통해 미국 '워싱턴'으로 향하는 길은 더는 불가능해졌다고 여길 수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7일 인민군 제2군단 지휘부를 방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8일 보도했다. 김 위원장은 지휘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나라를 적국, 타국이라 부르며 "한국이 주권을 침해하면 물리력을 조건에 구애됨 없이, 거침없이 사용하겠다"고 위협했다. 2024.10.18 연합뉴스

화해·협력 흐름 타고 대남 적대감 희석

'정신적 무장해제' 북한 내부 통제용?

또한 민주·개혁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이뤄지는 남북정상회담과 각종 교류 행사로 북한 주민 내부에서 화해·협력 흐름과 함께 한류의 침투와 한국에 대한 동경이 확산돼온 게 사실이다. 김정은으로선 이를 정신적인 무장해제로 여겼을 공산이 크다. 2020년 '반동사상문화 배격법'을 제정하는 등 한국 드라마 등의 시청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도 그 일환인 셈이다.

이번에 남한을 대한민국이라고 지칭하며 '동족'이 아닌 '적국'이라고 규정지은 것은 대남 적개심을 고취해서 북한 주민을 정신적으로 무장시키고 내부 통제를 강화하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더는 '희망 고문'을 당하기 싫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 상징적 조치가 바로 경의선·동해선 폭파와 대전차 방벽 구축 등 군사분계선(MDL) 일대의 요새화다. 김 위원장은 "앞으로 철저한 적국인 한국으로부터 우리의 주권이 침해당할 때 물리력이 더 이상의 조건 여하에 구애됨이 없이, 거침없이 사용될 수 있음을 알리는 마지막 선고(최후통첩)"라면서 "적을 다스릴 수 있고 억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고수하는 평화만이 믿을 수 있고 안전하고 공고한 평화"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미동맹의 성격 변이", "적들의 침략적 성격의 군사행동"을 이유로 들면서 "핵 억제력 강화"가 중요하고 정당하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는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광화문광장 관람 무대에서 건군 76주년 국군의날 시가행진을 지켜보던 중 김용현 국방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2024.10.1 연합뉴스

윤석열, 김정은 둘 다 '힘에 의한 평화'

한반도 평화 위협하는 힘과 힘의 충돌

다음은 '통일이란 비현실적 인식'이다. 무력을 통한 적화통일 정책은 북한이 남한과의 국력 경쟁에서 역전을 당하면서 포기했고, 8·15 통일 독트린을 통해 윤석열 정권이 '자유(흡수) 통일'정책을 천명한 상황에서 남한과의 화해·협력 과정을 통한 '평화통일'도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김정은은 그동안 견지해온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체제'를 기반으로 한 통일 노선을 폐기하고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걸고 체제 수성에 나선 모양새다.

실제로 그는 작년 12월 30일 노동당 중앙위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우리 제도와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흉악한 야망은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면서 통일정책 폐기 배경과 관련해 남측이 "외세와 야합해 정권 붕괴와 흡수통일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일 오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76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지대지 미사일 현무 등 한국형 3축 체계 장비들이 분열하고 있다. 북한의 핵·미사일 발사 대응을 위한 3축 체계는 킬체인(Kill Chain),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 대량응징보복체계(KMPR)로 이루어져 있다. 2024.10.1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국제안보전문가인 라미 김 다니엘 K 이노우에 아시아태평양 안보연구센터 교수는 9월 18일 자 <포린 폴리시> 기고문에서 "북한은 경제적, 외교적, 문화적, 그리고 핵 분야를 빼곤 심지어 군사적 측면에서도 남한에 많이 뒤떨어져 있고,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격차가 이제 북한 주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이라면서 북한이 한반도를 통일할 합법정부 경쟁에서 남한에 패배하면서 '흡수통일' 공포를 느끼고 있다고 진단했다.

신원식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13일 KBS1 일요진단에 경의선·동해선 폭파와 요새화와 "북한이 남쪽에서 쳐들어올 일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첫 번째 실질적 목적은 대량탈출을 막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는 상징적으로 다른 나라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이날 '강력한 힘으로 고수하는 평화'를 주장했고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1일 국군의날 기념 연설을 포함해 틈만 나면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고 있어 갈수록 '힘과 힘의 충돌' 우려가 커짐에 따라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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