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ㆍ전 주러시아 공사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ㆍ전 주러시아 공사

한국에 대해 우크라이나는 물론 미국과 나토도 살상무기를 지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살상 무기는 지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최근 외신 보도에 따르면 한국산 부품이 들어간 자주포를 폴란드가 우크라이나에 인도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정부의 입장이 바뀐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데 그러한 주장의 논거들을 짚어 본다.

첫째, 자유민주 진영의 일원으로서 강대국 러시아의 ‘명분 없는’ 침공을 받은 ‘민주주의’ 국가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한다? 하지만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나토 사무총장도 인정하였듯이 이번 전쟁은 2014년 우크라이나 중앙정부가 러시아계가 거주하는 동부 지역에 대해 ‘인종 청소’ 수준의 만행을 자행하여 내전이 발발한 것이 기원이고, 지난 8년간 미국 등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러시아를 겨냥한 칼’로 만들어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자극한 결과이다. 1990년 독일 통일에 대한 소련의 양해에 대해 서방은 나토가 1인치도 동진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는데 이후 서방은 약속을 파기하고 동진을 계속하여 동유럽에 병력과 전략무기를 배치하였으며, 우크라이나마저 나토에 가입시키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음에 따라 러시아로서는 실존적 안보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국은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막으려고 하기보다는 전쟁을 부추기는 행태를 보였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오래전부터 유럽연합 가입을 희망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은 것은 심각한 권위주의적 통치 때문이었다. 즉, 우크라이나에 민주주의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이번 전쟁 전에는 서방 언론이 젤렌스키 대통령과 우크라이나에 대해 혹평 일색이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나.

둘째, 1950년 한국이 북한의 침략을 받았을 때 미국 등 서방이 도와주었으니 위기에 처한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한다? 그런데 6.25 전쟁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우크라이나가 무슨 도움을 주었다고 우리가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할 도덕적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가. 보은은 도움을 준 대상에게 하는 것이다.

셋째, 한국의 국력에 비춰 볼 때 현재까지의 지원이 미흡하다? 이미 한국은 상당한 규모의 인도적인 지원과 군수물자를 제공하였다. 필요하다면 살상 무기가 아니라 인도적인 지원을 대폭 늘리면 될 것이다. 6.25 전쟁 때도 국제사회는 나라마다 자신의 형편과 입장에 따라 한국을 지원하였다. 반드시 살상 무기를 지원해야만 지원하는 것일까.

넷째, 미국의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한미동맹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맹은 적용 지역과 협력의 내용이 무제한적이지 않다. 한미동맹도 마찬가지이다. 한미동맹의 법적 문서인 1953년 상호방위조약 어디를 보아도 미국이 한국에 대해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라고 요청할 수 있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이미 푸틴 대통령이 경고한 대로 한국이 살상 무기를 지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로 러시아는 북한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할 수 있고 이는 한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다섯째, 우크라이나가 패배하도록 놔두면 중국의 대만 침공 욕구를 자극할 수 있고 나아가 한국의 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부터 오랫동안 거론되어온 시나리오이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중국이 말로는 통일을 외치고 있으나 하나의 중국 원칙과 대만해협의 현상 유지가 보장된다면 굳이 미국의 덫에 빠지는 모험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

여섯째, 전 세계가 일사불란하게 우크라이나 편을 들고 있다?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나토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재정적 부담은 물론 이번 전쟁으로 야기된 에너지 및 곡물 가격 폭등,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염치없는 행태 등으로 인해 최근 들어 나토에 반대하는 시위가 확산하는 추세이다. 즉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단일대오가 흔들릴 조짐이 있다. 또한, 브릭스(BRICS) 국가들은 물론이고 중동,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국익을 고려하여 친서방보다는 친러 성향을 보이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3월 초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수출통제품목을 기존 57개에서 798개로 대폭 확대하였으며 이에 대해 러시아는 우려를 표명하였다. 4월에는 한국 대통령이 12년 만에 미국을 국빈 방문할 예정이다. 미국은 동맹 70주년을 맞아 한국 대통령에게 ‘가치동맹’을 내세우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할 것이다. ‘가치동맹’이라는 수사에 휘둘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국의 전쟁이 되는 길에 들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요구를 100%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반미’이고 ‘친러’는 아니다. 이번에 반도체 법을 보아도 미국은 철저히 미국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고 동맹국의 이익에 대한 배려는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번 전쟁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며 전후 세계는 어떤 의미에서든 전쟁 전과는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단순히 에너지 공급원이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 진출의 핵심 파트너이며 앞으로 남북통일의 우군이 될 수 있는 러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러시아와 척을 짓는 것의 득과 실을 긴 호흡으로 냉철하게 따져 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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