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전 주러시아 공사

최근 국내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러시아 제재와 관련하여 한국 기업의 러시아 진출을 제약하려는 미국의 압박이 본격화되고 있는 듯하다. 한미 양국 간 고위급 회담 등 여러 계기에 미국 측은 한국 기업의 러시아 내 활동 유지 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였다고 한다. 이번 주 초 호세 페르난데스 국무부 경제성장 · 에너지·환경 담당 차관의 방한과 관련하여 우리 측 관심사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내 한국산 전기차 차별조항 완화이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대러 제재 관련 한국에 대한 요구가 주요 의제일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입장은 한마디로 한국은 러시아와의 경제 교류를 최대한 축소하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한국은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 제재 캠페인에 호응하여 이미 금융 및 수출입에 있어 독자적인 조치를 취하는 등 성의 표시를 한 바 있고 이 때문에 러시아의 비(非)우호국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동맹국들에 지지 이상 요구는 지나쳐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실제로는 러시아의 약화라는 전략적 목적으로 우크라이나로 하여금 대리전을 수행하게 하면서 동맹국들에 대해 단순한 지지와 지원이 아니라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다. 더구나 한국 기업들이 입게 될 손실을 미국이 보상해 준다는 보장도 없다. 유럽국가들이 러시아산 가스의 수입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게 되자 미국이 대체재로 미국산 셰일가스를 공급하면서 러시아산 가스보다 3~4배 비싼 가격을 요구하고 있는 것에 대해 유럽국가들의 불만이 상당하다. 대러 제재에 동참하는 동맹국들에 대한 미국의 배려가 자기 배만 불리는 것인가?

미국이 대러 경제 관계를 단절한다고 하지만 미국 자신이 감수해야 할 피해는 무시할 정도이다. 실제로 2021년 미-러 교역은 미국의 대외교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8%도 안 된다. 그런데도 미국은 자국이 아쉬운 분야에 대해서는 제재를 유보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소형모듈원자로(small module reactor)의 연료로 쓰이는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HALEU, High-Assay Low-Enriched Uranium)을 여전히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는데, 이 연료는 러시아의 테넥스(Тэнэкс)가 세계에서 유일한 공급자이다. 또한, 미 재무부가 애초 미국 금융기관에 대해 러시아 국채와 회사채 거래를 금지하였으나 미국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 8월 제재를 취소함에 따라 JP Morgan Chase, Bank of America, Citigroup, Deutsche Bank, Barclays, Jeffries Financial Group 등이 모스크바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는 것은 JP Morgan Chase는 러시아 경제가 2023년이면 채무불이행(default)에 직면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고는 계속 러시아에서 영업을 벌이고 있는 점이다. 미국이 제재한다고 큰소리를 치려면 모범(?)을 보이면서 다른 나라들에 동참하라고 해야 한다. 미국 자신은 이렇다 할 피해를 보지 않으면서 동맹국들에 대해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부당하다.

유럽국가들도 대러 제재 패키지를 이미 아홉 차례나 발동했지만, 자신들의 필요 때문에 러시아와의 교역을 완전히 중단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유럽국가들도 소형모듈원자로의 연료인 고순도 저농축 우라늄을 여전히 러시아에서 수입하고 있다. 대부분 유럽국가의 경우 2022년 2~8월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이 늘어났다. 유럽연합 통계(Eurostat)에 따르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은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이 대폭 늘었고, 유럽연합 27개국 가운데 7개국만이 수입이 줄었다.

일본은 어떤가? G7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미국의 정책에 호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때때로 러시아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실속은 챙기고 있다.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장관은 미국의 엑슨 모빌이 러시아 사할린-1(해저 석유·가스 광구) 프로젝트에서 철수했지만 일본 콘소시엄 SODECO는 계속해서 지분을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과거 러시아와 전쟁까지 치렀고 지금도 쿠릴열도(일본명 북방영토)를 놓고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지만 나름 유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난주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은 타스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러시아로부터 억지로 떼어내려는 워싱턴의 강한 압박으로 한국이 2022년 3월 반러시아 제재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축소되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고 있다. 서방의 제한으로 인한 러시아-한국 관계의 손실을 최소화하기를 바라는 것은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라고 답변하였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야기된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나름 한러 양국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보았듯이 대러 제재와 관련하여 유럽국가들과 일본은 물론 선봉장인 미국조차도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마당에 한국이 미국의 가치, 인권 등 외교적 수사에 휘둘려 중심을 잃고 국익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미국의 국익이 한국의 국익과 항상 일치할 수는 없어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하여 미국과 유럽연합은 사실상 전쟁 당사자이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에 인도적인 지원을 제공할 뿐이고 전쟁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6월 윤석열 대통령이 마드리드 나토정상회의에 참석함으로써 한국이 반러시아 전선에 동참하였다고 해석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나토 회원국이 아니며 나토와 제한된 범위에서 협력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라고 해서 러시아가 자동적으로 한국의 적이 될 수는 없다. 더구나 우크라이나는 한국의 동맹이 아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하고 있는 한미동맹은 모든 분야에 대한 것이 아니고 공간적으로 전(全)지구적인 것도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쟁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구호나 명분과 관계없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동맹국의 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에게도 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전략적 측면에서 특히 중국의 부상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복잡해지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중국의 압박을 상쇄하고 남북통일에 유리한 주변 정세를 조성하는 데 있어 러시아가 유용한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러시아의 약화가 우리 국익에 부합한다고 하기도 어렵다. 물론 한국외교에 있어 대미 관계는 최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관계이다. 그렇더라도 항상 미국의 국익이 한국의 국익과 일치할 수는 없다. 한국의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의 입장과 요구에 유의하되 우리 나름의 손익을 따져 보고 그 계산에 입각한 우리 입장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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